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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성경이 우리에게 오기까지(11)

조선의 “새빛” 선교사들-12
백정수 목사 더가까운교회

무역상인 이응찬은 하나님의 섭리로 존 로스 선교사의 조선어 교사가 됐다. 그러나 당시 조선인이 서양인을 돕는다는 것은 한편으론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거치면서 조선은 서양에 대해 적대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존 로스를 도와주던 이응찬을 다른 조선인들이 관찰사에 고발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역사적인 사실을 알아야 할 부분이 있다. 일반적으로 당시 조선을 집권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이 천주교(서학)를 비롯, 서양 세력을 모두 박해하고 배격하는 쇄국정책 다시 말해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를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원래 흥선대원군은 서양 세력에 적대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흥선대원군의 부인(여흥 민씨)과 딸들은 천주교(서학)를 믿고 있었다. 특히 부인 여흥 민씨는 매일 천주교의 기도문을 암송하며, 프랑스 신부에게 왕이 된 아들을 위해 감사의 미사를 종종 부탁할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고종을 키웠던 유모도 마르타(Martha)라는 세례명을 가졌던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으며, 흥선대원군 자신도 천주교 신자였던 문신 남종삼(왕족 자제 교육 담당, 1866년 순교)에게 개인적으로 ‘천주교(서학)는 진실된 종교’라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더구나 흥선대원군이 프랑스와 손을 잡을 생각을 하게 됐는데, 이에 대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급변하는 국제 정세였다. 제2차 아편전쟁 때(1856~1860)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청나라가 단번에 무릎을 꿇었다.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세계적으로 덩치만 큰 호구, 종이 호랑이인 것이 밝혀졌다. 당시 청나라가 가장 강력한 나라라고 믿던 조선의 지배층과 백성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은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이때 러시아는 통상을 요구로 군함과 병사들을 조선에 보낼 것이라고 조선 조정에 협박했다. 조선의 안보가 그 어느 때보다도 위협받던 시기였던 것이다.


천주교를 믿던 문신 남종삼을 비롯한 일부 조선 관리들은, 흥선대원군에게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러시아로부터 조선을 지키자는 제안한다. 흥선대원군 역시 조선의 안전을 위해 ‘먼 곳의 오랑캐로 가까운 곳의 오랑캐를 견제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를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그는 남종상을 통해 조선 조정과 프랑스 정부를 연결할, 베르뇌 주교와 만남을 계획했다. 


그러나 포교활동을 위해 황해도 있던 베르뇌 주교의 만남이 곧장 이뤄지지 않았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베르뇌 주교가 한양까지 오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이렇게 흥선대원군과 프랑스인 신부의 만남이 오랜 시간 지연되는 가운데 국외 상황이 크게 변하게 됐다. 계속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던 러시아가 자국의 상황(알렉산드리아 2세의 ‘농노제 폐지, 재정 개혁, 고등교육 개혁, 지방자치 개혁, 사법 개혁’으로 인한 이념적 갈등 심화)으로 조선에 대한 통상 요구 정책 기조가 변하게 됐던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으로서는 당장 전쟁이 날 것과 같던 위기 상황이 지나가게 됐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조선의 보수적인 지배세력과 반(反)대원군파들이 천주교와 프랑스와 교섭하려던 흥선대원군의 퇴진을 요구하며 압박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대원군은 자신의 입지 강화와 체제 안정을 위해 천주교를 박해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서양세력에 대한 배척은 명분을 더욱 얻기 시작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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