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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하며 책 읽으며-3

존 하워드 요더의 『 예수의 정치학 』을 읽고

 

 

오늘날 이 시대를 정의할 때 < 폭력의 시대 >라고 한다. 통신이 발달한 이 시대에 물리적 폭력, 언어폭력, 성폭력, 인종적 분쟁, 민족분쟁, 종교간 폭력, 국가 간 전쟁 등의 소식을 PC나 스마트폰 모니터를 통하여 실시간 생생히 지켜볼 수 있다. 이런 폭력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대답이 있는가? 어떤 구체적 삶의 행동이 있는가?

 

존 하워드 요더(John H. Yoder 1927-1997)의 대표작 예수의 정치학 The Politics of Jesus 은 이런 폭력의 문제에 대하여 기독교윤리(정치)의 실천적 측면에서 대답하려고 한다. 요더는 기독교 소그룹 공동체 메노나이트(Mennonite) 평화주의자이다.

 

요더가 처음 이 책을 쓸 당시 1970년대 미국 기독교 사회의 주류 윤리학은 < 중간기 윤리> 주장하고 있다. 중간기 윤리는 영원한 윤리가 아니라 이 땅에서 잠시 주님나라 임하시기 전의 상황속에서 발생되는 윤리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상황윤리이다.

 

상황에 따라서 개인의 신앙양심에 따라서 그때 그때 달리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성서윤리적용은 신앙적 삶의 일관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며, 복음서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행동 역시 상황윤리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대기독교 주류윤리학의 해석들은 필요시 꼭 예수 십자가의 길처럼 살 필요가 없다는 잘못된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이다.

 

요더는 이런 중간기 윤리, 상황윤리를 반대하면서 항구적 윤리, 예수윤리의 온전성을 주장한다. 신약성서에서 일관되게 이야기되고 있는 하나님나라 윤리 즉 산상수훈의 현대적 적용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의 삶은 윤리(정치)적인 면에서 즉 인간과 인간,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간의 질서속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예수와 바울의 삶을 뒤쫓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신약성서의 이야기가 한 좋은 기독교 윤리적 샘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따라 갈 수 있는 실천적 삶을 제시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속에 이렇게 복잡한 현대사회속에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복음서의 삶과 바울과 베드로등의 서신서 이야기들을 적용하기에는 윤리학적으로 너무 단순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적용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성서는 단지 인간의 죄성 지적과 구원의 길만 가르친다고 믿고 있는 기독교신자들이 많다. 과연 그럴까?

 

요더 윤리학의 핵심은 < 기독교평화주의 >. 요더가 예수의 정치학 을 처음 발간했을 때 소장파 학자의 단순한 주장이라고 생각했기에 미국의 주류윤리학계에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발간후 30년이 지난 현재 요더의 책이 꾸준히 팔리고, 읽히며, 현대 기독교 고전(古典)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폭력은 폭력으로 대할 때 잠시 중단될 수 있지만 결국 보복폭력으로 더 강하여 지고 반복 재생산된다는 것이 오늘날 누구나 다 아는 일반적 진리가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베트남전이다. 요더의 책은 베트남 전쟁 끝 무렵인 1972년에 첫 출간되었다.

 

지난 반세기 미국중심의 팍스아메리카가 전세계를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질서를 유지했지만 결국 반미국가들의 엄청난 저항으로 미국의 힘만 급격히 약해지고 있다. 또한 지난 반세기 미국기독교의 신앙적 열정이 기독교현실주의라는 힘에 바탕을 둔 모양새를 가지고 지나왔다.

 

결과는 미국사회속에서 영향력의 감소, 성도들의 신앙열정의 퇴보를 가져왔다. 개인, 단체 국가가 폭력을 외칠 때 기독교는 평화를 외쳐야 한다. 예수가 십자가를 택한것은 단지 개인의 미래적 천국으로의 구원을 제시하였을 뿐만아니라 구원이후 이 땅에 남아있는 성도들의 윤리실천적 삶의 구체적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구원이후 이 폭력이 난무하는 땅에서 어떻게 살것인가? 요더는 예수가 지신 십자가를 제시한다. 십자가는 평화이다. 그런데 그 평화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성도 필연의 문제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구원받은 자들이고 구원받은 자들은 < 폭력을 평화로 > 바꿀 책임이 있는 것이다.

 

힘에 힘으로 대항했던 세력들은 중세교회의 타락을 가져왔고, 실용주의 미국기독교가 맘몬과 세상 권력 앞에 굴복하여 복음의 힘을 잃어가고 있다. 성서의 본질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자들은 단지 성서가 구원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예수가 가신 그 길을 가기를 명령하고 있다라는 것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요더의 기독교평화주의가 완벽하고 유일한 기독교윤리학의 모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요더의 윤리학은 21세기 기독교 윤리분야에서 반드시 첫 번째로 고려해볼 가치가 분명하게 있다. 지금 한국기독교를 생각할 때 요더 예수의 정치학의 내용이 뜬 구름처럼 이해 될 수도 있다. 남북한의 대치 상황에서 집총거부와 전쟁무용론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요더는 성경을 따라가자는 일반적 주장을 매일, 매순간의 구체적 주장으로 바꾸고 있다.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성서를 보고, 성서를 나름대로 해석한다. 그런데 성서를 읽을 때의 마음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 나는 성서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것이다> <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다르다> 고 가정을 하고 성서를 읽고. 해석하고, 삶에 실천한다면 결과는 매우 이상하고 다르게 나올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 미국, 한국 기독교의 상황이 성서의 모습과 다르고 기이하다.

 

요더의 기독교평화주의는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아주 낯선 개념이다.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현실주의가 더욱 친숙한 개념이다. 폭력으로 다가오는 적을 예상하여 적당한 힘을 비축하고,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정당방위로서 폭력적 힘을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폭력의 정당성을 경계하여야 한다.

 

입으로는 예수의 십자가를 따라가자고 하면서 구체적 상황에서는 힘을 사용하여 굴복시키며 지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논리인가?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 내가 매일 죽노라 >가 단지 마음의 죄성만을 죽이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폭력도 거부하며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 폭력의 근원적 외양, 내양, 뿌리까지 그 어떤 모습도 가지지 말것을 경고하는 것인가?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렇게 살라고 명령하신다.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태복음 5)

 

조성배 목사

대전침례교 목사 독서학교 리더

반석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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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믿음으로 도약하는 ‘라이즈 업 뱁티스트’
3500여 침례교회가 함께하는 2025 전국침례교회 연합기도회 ‘라이즈 업 뱁티스트’가 지난 6월 1일 저녁 7시 30분, 대전은포교회(이욥 목사)에서 시작됐다. 이번 기도회는 6월 13일까지(6월 7일 제외) 전국 12개 교회에서 열리며,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되고 있다. ‘더 큰 믿음으로 도약하라!’란 주제로 진행되는 이번 연합기도회는 대전은포교회에서 첫 문을 열었다. 대전은포교회 찬양팀의 찬양으로 시작된 예배는 대전침례교연합회 회장 임헌규 목사(자성)의 기도, 다음세대캠프 홍보 영상 상영으로 이어졌다. 총회 전도부장 이황규 목사(주우리)의 인사에 이어 총회장 이욥 목사가 환영사를, 총회 총무 김일엽 목사가 광고를 전했다. 이욥 총회장은 “올해로 5년 차를 맞은 라이즈 업 뱁티스트가 어느 때보다 말씀과 기도를 사모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며 “3500여 교회 목회자들이 함께하면서 성령의 역사, 치유, 영혼 구원의 역사가 펼쳐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헌금 시간에는 찬양팀 ‘더 웨이’가 특별찬양을 했고, 참석자들이 함께 공동기도문을 낭독했다. 공동기도문에는 △나라와 민족 △라이즈 업 뱁티스트 △다음세대를 위한 기도 제목이 포함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