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한 장밖에 남지 않은 달력이 눈에 들어온다. 무려 11장의 달력을 벌써 내 손으로 다 떼어내니, 올해 내 남은 날이 한눈에 들어온다. 끝이 훤히 보인다. 난 지금 그 마지막 달력의 한가운데에 서있다. 물론 달력이야 새로 걸면 된다. 하지만 정말 이 12월이 내 인생에 남은 날들이라면 어떨까? 지금 난 뭘 해야 할까? 왠지 올 12월 달력은 그 물음을 강하게 던진다.
벌써 재작년 12월, 故강영우 박사가 췌장암에 걸려 그를 사랑했던 이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e-메일을 보낸 것이 세상에 공개돼 화제가 됐었다. “의료진이 최선을 다했지만 지금 내게는 한 달 여의 삶만이 허락됐다”고 그는 당당히 알렸다. 그래서 “더 이상의 치료는 중단한다. 차라리 퇴원하여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겠다”고 밝혔다.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시각장애인으로 살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시각장애인박사가 된 자랑스런 인물이다. 조지부시 대통령시절엔 백악관국가장애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 두 아들 역시, 장남은 워싱턴포스트가 선정한 ‘2011년, 최고의 슈퍼닥터’, 차남은 오바마 대통령의 선임 법률고문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장애를 극복한 성공모델이며, 훌륭한 가장이며, 자상한 남편이자, 모든 신앙인들에게도 본이었다. 그러니 이 좋은 세상을 68세의 일기로만 마감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웠으리라.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난,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아왔다. 전쟁이 휩쓸어 폐허가 된 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두 눈과 부모와 누나도 잃은 고아가 지금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건 하나님의 인도 덕분이었다. 나는 두 눈을 잃고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다.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나의 남은 날도 미리 알게 되어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할 시간도 허락받았으니 더욱 감사하다. 여러분으로 인해 나의 삶은 사랑으로 충만하였고 은혜로웠다. 그러니 나로 인해 너무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렇게 그는 ‘2011년 12월의 남은 날’을 ‘인생의 남은 날’로 여기며 조용히 준비하며 기다렸다. 그리곤 이듬해 2월, 하나님의 품에 영원히 안겼다. 참으로 멋진 마지막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지막 역시도 그래야하지 않을까? 무조건 기피하고, 두려워하고, 미루려고만 할 게 아니라 하나님 부르시는 그 시간에 영광스럽게 Well-Leaving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내 남은 날도 더욱 야무져지겠지. 더 알차고 풍성해지겠지. 지금 내 삶과 믿음과 일과 가족이 더 소중해지겠지.
그런 점에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맹모는 정말 인생을 아는 자였던 것 같다. 무덤 곁에서 먼저 인생의 끝을 가르치고, 시장 통에서 치열한 삶의 현장을 익히게 한 뒤, 비로소 서당에서 학문을 익히도록 한 지혜로운 어머니. 그래서 맹자의 철학은 그 누구보다 깊고도 넓었나 보다.
그렇다. 죽음을 아는 자가 멋진 삶도 산다. 예일대학의 유명한 임종치유사(Thanatologist), 셸리 케이건(Shelly Kagan) 교수가 17년 동안이나 죽음에 대해 강의하며 내린 결론도 결국 그것이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 사람만이 인생을 제대로 산다.”
이제 망원경을 바로 들고 보자. 망원경을 거꾸로 보듯 죽음을 보지 말자. 죽음은 그렇게 멀리만 있지 않다. 코앞에 있다. 조물주가 정한 예외 없는 생명의 법칙을 겸허히 받아들이자.
이제 그 조물주가 내 삶의 수고에 마지막 보상을 해 주시려한다. 고생에 대해 놀라운 안식을 주시려 한다. 맡겨진 사명 완수에 대해 지극한 상을 주시려 한다. 그러니 그 때가 언제라도 기쁘게 맞자.
내가 태어날 땐 나는 울었고 모든 사람은 웃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을 떠날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울지라도 나는 행복하게 웃자. 이것이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마지막의 美學이다.
김종훈 목사
오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