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소명>
나는 소녀회 캠프에서 내 삶의 진로에 큰 영향력을 끼친 한 여전도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그 당시 부산 침례병원 원목과 전도사로 섬기며 전여회의 청소년 부장으로 섬겼던 남현자 사모님입니다.
그 분이 캠프 마지막날 헤어지면서 나에게 간호사가 되어 침례병원에 와서 섬기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웃으면서 생각해 보겠다고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애냐하면 나의 장래 희망은 미술가나 외교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 나의 삶은 확실하게 변했습니다. 캠프에서 배운데로 날마다 말씀읽고 기도하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연희침례교회 예배에 성실하게 참석하고 학교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년후 지금은 하늘 나라에 계신 허윤기 목사님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침례받고 싶어서 죽겠다고 대답해서 문답도 없이 광나루 강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진로 문제를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기도만 하면 남현자 전도사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결국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생각이 들어 기도가운데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남전도사님과 이재순목사님(당시의 침례병원 원목실장)의 인도를 따라 3년제였던 전주 예수간호학교(현 예수 대학교)에 침례병원 장학생으로 입학했습니다.
생면부지의 전주로 가는 것에 대해 가족들과 교회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으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가족을 멀리 떠나야 했고 학사증도 포기한 나에게 하나님은 수석입학이란 영광을 주셨습니다.
나는 침례병원 장학금을 받기로 했기 때문에 수석입학생에게 주었던 입학금 전액을 차석 학생에게 양보했습니다.
졸업식 때도 3년간 실습점수가 가장 높은 간호학생에게 주는 병원장 상을 수상하게 하셨습니다. 졸업후 침례병원으로 떠나야하는 나에게 선교사 병원장이었던 씰박사가 친히 찾아와 섭섭하다고 말하던 순간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3년간 전주에서 간호학생으로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훈련을 받았습니다. 전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해야했고 아침 예배 와 저녁예배에 참석하고 철저하게 신앙훈련을 받았습니다.
수업 첫시간에 학교장이었던 변마지 선교사가 제시한 간호사가 따라야할 성경 말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는 말씀은 내 간호사 시절 나의 삶의 지표가 됐습니다.
나는 간호가 하나님이 주신 천직이라 믿었기에 환자들에게 가장 친절한 또한 복음을 전하는 간호사가 되기로 헌신했습니다. 또한 신앙인으로서 교회생활에도 최선을 다해 시간과 물질과 몸을드려 헌신하기를 힘썼습니다.
졸업 후 침례병원 특진실에서 의무원장이며 선교사였던 테이버의사와 2년을 함께 일했는데 신임 간호사가 특진실에서 일하도록 선택된 것은 정말 의외의 일이라고 했다. 특진실은 대부분의 환자가 외국인이어서 나는 2년간 매일 영어 훈련을 무료로 받는 기회가 됐습니다다. 이것은 이후의 내 사역에 큰 밑거름이 된 하나님의 놀라운 예비하심이었습니다.
2년후 하나님은 내가 거제도에서 보건 간호사와 조산사로 일하도록 부르셨습니다. 내가 거제도란 그당시 말할 수없이 낙후된 섬으로 가는 것에 대해 침례병원의 많은 분들이 말렸으나 그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 계셨기에 누구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거제도에서 명예 국내선교사로 2년을 봉사한후 전주에있는 모교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학교에서 1년을 가르치며 간호학생들에게 큰 병원에서 일하는 것도 좋지만 낙후된 대한민국 농촌의 의료현실에 대해 도전하며 그들이 보건간호사로 헌신할것을 도전했습니다.
그때 당시 전주 예수병원은 지역사회 보건사업으로 유명했는데 독일에서 후원을 받아 면단위 분원을 세우고 간호대학과 함께 한국의 의료전달 체계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병원의 지역사회 보건과 수간호사로 자리를 옮겨 그일에 함께 헌신하게 됐습니다.
의사들이 가지않는 시골에 간호사들을 훈련하여 보내는 보건 진료원 제도가 그때 개발 단계에 있었고 그일로 나는 간호대 교수들, 의과대 교수들, 보사부 관계자들과 국내외의 많은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학사증도 없는 보건 간호사였지만 많은 실전 경험 때문에 병원대표로 참석해 회의에서 많은 의견을 제시하고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1979년 스리랑카에서 있었던 지역사회의료 개발회의에 참석했을때 나는 그 나라의 낙후된 상황과 주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움에 하나님께 언젠가 의료 선교사가 되어 동남아에서 헌신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 후 보건진료원 제도를 보사부에서 받아들여 전주 에수병원과 간호대학은 보사부에 훈련기관으로 선정해 줄것을 신청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는 많은 기도를 하고 나는 또 다시 유니세프가 후원하는 보사부 회의에 참석하게 됐습니다.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앞에 한 자리가 비어 있었고 옆에는 외국인 남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회의 도중 그 외국인은 계속 나에게 영어로 회의 사항을 질문했는데 다 대답해 줄 수 있었습니다. 회의 후 그가 유니세프에서 대표로 참석한 사람임을 알았고 우리는 보사부로부터 보건 진료원 훈련 기관으로 선정됐습니다. 기도가운데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었습니다.
이숙재 전 총무
전국여성선교연합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