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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통일에 대한 한국교회의 사명 - 3

 

설문 결과를 보면 고령층·저학력층 일수록 한 민족이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의견이 다수였고, 저연령층·고학력층일수록 안보불안 해소 이유로 필요하다는 의견이 다수였음을 알 수 있다.

 

넷째, 북한의 군사적 도발 가능성에 대해서는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74.5%로 다수이며, 우리나라 군사안보 상황에 대해서는 위험하다는 의견이 71.8%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민족의 분단 현실은 반드시 극복돼야 하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은 반드시 성취돼야 한다는 당위론이 출발점이다. 왜냐하면 남북통일은 민족의 정의롭고 평화로운 생존과 번영을 위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통일의 열망과 관심이 고조되어 있는 이 시점에서 한국교회가 민족의 화해와 남북통일을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성경에서 남북통일의 원리를 찾아내고 이를 현실에 적용하려는 노력은 그동안 통일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연구되어 왔으나, 통일신학은 사회과학적 분석에 치우친 진보주의자들의 전유물로 간주됐다.

이 문제를 정부에 의하여 주도 되고 정권에 의하여 제시되는 남북통일의 방법이나 사회과학적 분석이 아닌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의 관점에서 남북 간의 통일의 문제를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통일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기원전 8세기 남왕국 유다에서 활약한 미가 예언자가 예언한 평화의 나라는 우리 민족의 통일에 대해 좋은 모형을 제공한다.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4:3~4).

 

구약을 보면 정의와 사랑을 담보하는 언약공동체를 발견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공동체를 통해서 평화를 이루기를 원하셨다.

이러한 평화의 나라 구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이뤄야 할 사명이라고 본다. 이에 필자는 성경이 제시하는 통일과 화해에 대한 좋은 모델로 구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야곱과 에서의 화해’(33:3~4), 신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마리아인의 비유’(10:25~37)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야곱의 인생 스토리 가운데 야곱과 에서가 화해하는 장면은 엄청난 감동의 장면이다.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 맞추어 그와 입 맞추고 서로 우니라”(33:3~4).

야곱은 에서 앞에 일곱 번 절을 하면서 나아가자 야곱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던 에서도 마음이 녹아 달려와 서로 안고 입 맞추고 울었다고 했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을 온전히 낮추며 진심으로 회개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야곱의 철저한 자기 겸손에 의한 화해이다.

남북은 지난 60년의 엄청난 간격과 합치될 수 없는 이데올로기적 이질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남북관계는 야곱의 자기겸손에 의한 화해처럼 서로를 비우고 낮추며 서로를 용서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랫동안 갈등과 적대감, 미움과 불신 속에 갈라진 남북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상대방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겸손과 철저한 회개에 기반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느 누구보다 앞장서서 남북의 화해를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둘째, 사마리아인의 비유(10:25~37)는 통일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예수님 당시 유대와 사마리아는 종교적으로 갈라져 있어서 서로 원수 관계였다. 이런 관계에서 예수님이 비유를 하시면서 강도 만난 유대인을 구해준 사람을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닌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한 것은 그 당시 사회적, 종교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의미가 있다.

사제나 레위인은 종교적인 이념을 내세우며 분열을 조장한다. 결국 그들은 생명보다 종교적인 정결법을 더 소중히 함으로써 강도 만난 유대인을 그냥 지나친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적대적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갈등과 미움, 이념 차이를 넘어서서 죽어가는 유대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누가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고 물으면서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한민족인 남과 북은 분열과 갈등으로 인해 지난 오랜 역사 속에서 서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다. 이 갈등과 분열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처럼 갈등과 미움, 이념으로 인한 과거의 감정이 아니라 바로 무엇보다 고귀한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헌신적인 노력이다.

우리의 구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이 사랑과 평화를 추구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화해와 화목의 종’(2:13~19)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분열과 갈등과 억압의 역사 속에서 평화와 화해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4:18~19; 14:27).

그리고 사람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시고 인간들 사이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 되게 하시려고 고난을 받으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다(10:36~40).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남과 북의 갈등과 분열, 미움과 이념 차이를 넘어서서 화해와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고후 5:18)을 주셨으며 교회를 통해서 이 직무를 지속적으로 수행해야만 한다.

 

김종걸 교수

침신대 신학과

(체계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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