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한국교회가 남북한 통일운동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잘못이 있다면 반성하고 회개해야 하며, 좋은 점은 계승해야 한다. 그럼 한국교회가 정부의 통일정책에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 살펴보자.
첫째, 해방이후부터 50년대까지는 이승만 정권의 제 1공화국 시대에 해당된다. 이 시기 정부의 북한을 향한 공식정책으로 ‘북진통일론’이 있었다.
이 시기 정부의 통일정책에 대해 한국기독교는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김창준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좌파가 있었고,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선을 따르는 중도파가 있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우파였던 대부분의 한국교회 노선이다.
둘째, 60년대 통일논의는 남북 교류협상론 등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좌파는 한국 전쟁으로 남한의 기독교에 신뢰를 주지 못했고, 우파로 단순화된 한국교회는 신학적 성향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오직 극단적 ‘반공’에 의해 그 정체성이 규정됐다.
이 시기 한국교회 대다수의 흐름은 여전히 반공노선을 견지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60년대 새로웠던 것은, 강원용, 박성중, 박형중, 문익환 목사 등에 의해 공산주의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의 방식으로서 교회 내부의 혁신과 사회내부의 개혁이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70년대 통일논의는 박정희 정권의 후반기에 해당되는 시기로 이전의 통일정책과는 많이 다르다. 정부는 1970년 8?15 ‘평화통일선언’, 1971년 ‘적십자회담’ 그리고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통해 두 개의 한국을 인정한다.
특히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통일원칙을 기본 골격으로 하는 ‘7?4 남북공동성명’은 실로 국민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에게 충격을 던졌다. 1970년대는 유신체제하에서 진보세력이 권위주의적인 정권과 첨예한 대결과 대립을 보인 시기이다.
이러한 대결로 인해 1970년대 한국교회는 인권 투쟁에 전념했던 진보진영과 보수 측 사이의 양대 진영으로 더욱 양극화되는 시기였다. 한국교회의 진보와 보수는 그 이전보다 다원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진보는 WCC의 영향을 받아 ‘반공’에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흐름으로 변화됐고, 보수는 복음 전도에 기초한 민족 복음화 차원의 통일 운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와 보수 모두 통일정책의 공통분모로 ‘반공’의식을 철저히 가지고 있었다.
넷째, 80년대 통일논의에 있어 한국교회는 정부에 의존했던 논의를 한국교회 스스로가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았다. 아울러 민족통일 문제를 교회의 선교적 과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가장 활발한 통일운동을 전개했던 한국기독교장로회는 1980년 3월에 “통일은 교회의 선교의 과제”임을 천명했고, 1986년 처음으로 통일문제를 신앙고백서에 포함시켰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도 평화통일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임을 밝혔다.
80년대 한국교회의 통일논의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1988년 2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다. 이 선언으로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에 있어 보수가 진보를 비판하며 입장 차이를 드러내었지만, 이 선언은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만열은 이 선언을 한국기독교의 한국통일 운동사, 그리고 세계기독교 운동에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한 선언이라고 밝히고 있다. 1980년대는 보수와 진보가 남북통일 운동에 있어서 대립관계를 형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통일 문제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적 차원에서 인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섯째, 90년대 통일논의는 새로운 분위기로 전환됐다.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1990년 독일통일 때문이다. 그 결과 1991년 9월에 남과 북은 국제연합에 각각 회원국으로 가입, 1992년 2월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효시켰다.
그리고 1993년 2월 남한에는 32년 만에 문민정부가 출범해 ‘흡수통일’을 배제하고 ‘합의통일’을 토대로 하는 ‘3단계 3기조 통일정책’을 천명했다.
90년대에 들어와 기독교 통일운동에 보수 진영이 활발하게 참여해 ‘평화와 통일운동을 위한 남북나눔운동’(1993), ‘기독교학문연구소’(1994),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남북나눔운동’ 등이 참여하여 “1994 한국기독인통일선언”,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발표한 “통일 및 북한 선교를 위한 결의문”(1994.5) 등을 발표했다.
가장 획기적인 것은 1994년 12월 15일 한국교회의 120여 교단 및 연합기관이 평화통일을 함께 추진해 갈 수 있는 ‘한국기독교평화통일추진협의회’가 창립됐다는 점이다. 특히 90년대 들어서서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에 제 3의 새로운 틀이 형성됐는데 이것은 북한의 경제난에 기초한 대북한 물질지원이다.
이념 논쟁적 통일운동을 지양한 현실적이고 실천적 통일운동으로서 보수 진영에서 그 첫 관문을 열었고, 이후 진보와 보수 양 진영이 ‘남북나눔운동’을 창립함으로 한국교회의 제 3의 통일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여섯째, 2000년대 정부의 통일 논의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으로 6.15 남북공동선언(2000년)이 이루어져 남북정상회담, 남북교류와 경제협력 활성화, 이산가족상봉, 통일문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졌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10.4 남북공동선언(2007년)이 발표되어 남북정상회담, 남북 관계 발전 및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남북간 경제협력 등이 이뤄졌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남북간 대화는 중단되고 전반적인 남북관계는 급격히 냉각됐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인 “비핵. 개방, 3000운동’은 한국교회의 지속적인 성명서와 요청으로, 2007년 10.4선언과 2000년 6.15선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변화된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2010년 3대 공동체 통일구상-평화공동체(안전과 평화), 경제공동체(교류와 협력), 민족공동체-을 발표했다. 한국기독교는 2000년대 들어서서 진보와 보수의 갈등을 넘어서 북한사회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교류확대에 함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풀어야 될 과제는 정부의 통일정책보완과 협력 그리고 북한선교역량을 확대하는 길이다. 한국교회는 정부의 통일정책을 지적하고, 살펴봐야 한다. 한국교회도 정부의 통일정책을 협조하며, 보완해주며, 정부의 낼 수 없는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창구역할을 함으로, 북한이 오판하거나, 잘못된 행위를 하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것도 한국교회의 사명이다.
김종걸 교수
침신대 신학과(체계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