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는 엠마오 부활현현 사건을 통해(눅 24:13-35) 자기 시대의 기독교인들을 향해 그들이 믿고 있는 부활의 예수를 인격적으로 알아보고 체험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그는 이어서 부활의 예수께서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자리에서 현현한 사건을 통해(24:36-43) 예수의 부활을 육신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헬라인들의 대중적 신앙에 근거한 영혼불멸적인 이해를 비판하고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존재 전체 곧 그의 육신과 영혼 전부를 포함하여 전인의 부활인 것을 변증적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특히 고린도전서 15장과 고린도후서 5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부활관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누가는 이러한 헬라주의적 부활관을 비판하면서 예수의 부활을 몸(신체와 영혼 전체)의 부활이라는 의미로 예수의 말씀을 통해 제시한다: “내 손과 내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8-39).
여기서도 예수의 말씀은 두 가지로 몸의 부활을 제시한다. 첫째는 예수의 살아난 존재를 보고 그의 부활의 의미를 깨달으라는 말씀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공생애를 사셨으며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했던 예수의 존재 전체가 다시 살아난 것을 부각시킨다. “내 손과 내 발을 보라”는 말씀은 요한복음 20:20, 27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흔적을 가리킨다.
누가의 표현은 일인칭 대명사(소유격)의 반복적인 사용(ta.j cei/ra,j mou kai. tou.j po,daj mou)을 통해 십자가에 못박혔던 예수의 손과 발을 강조적으료 나타낸다. 요한은 부활의 예수께서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을 반복하여 표현한다(요 20:20 손과 옆구리; 20:27 내 손과 내 옆구리).
누가는 예수의 말씀에 삼인칭 대명사(주격)를 사용하여 그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는 목적은 그들이 지금 보고 있는 존재가 “예수 자신인 줄”(evgw, eivmi auvto,j) 곧 “십자가에 못박혔던 바로 그 나사렛 예수”라는 것을 강조적으로 표현한다.
둘째는 부활하신 예수의 존재를 만져보고 느낌으로 알아보라는 것이다. “나를 만져보라”(yhlafh,sate, me)는 말씀도 예수의 살과 뼈를 포함한 그의 존재 전체가 부활한 것을 나타낸다. ‘만져보다’로 번역된 동사는 ‘붙잡다’(handle) 혹은 ‘접촉하다’(touch)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공생애 시절에 제자들이 예수를 붙잡기도 하고 그와 접촉하기도 하면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모습을 통해 그의 부활의 참된 의미를 제시하려는 말씀이다.
예수의 두 번째 말씀의 다음 부분이 예수의 부활이 살과 뼈를 가지셨던 예수의 존재 전체가 부활했다는 것을 보충하여 제시한다. “‘영’은 살과 뼈가 없다”(pneu/ma sa,rka kai. ovste,a ouvk e;cei)라는 말은 헬라적 인간관에서 살과 뼈로 구성된 신체에 반대되는 요소로서 영 혹은 영혼의 존재를 가리킨다. “나는 너희가 보고 있는 바와 (살과 뼈를) 같이 갖고 있다”(kaqw.j evme. qewrei/te e;conta)라는 말씀은 영혼불멸적 부활관을 반박하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헬라적 인간관에 따른 신체의 요소가 없는 영의 존재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존재로 공생애를 사셨던 나사렛 예수의 존재 전체가 부활하신 것을 나타낸다. ‘뼈’(ovste,on)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아주 드물게 사용되었는데, 이곳과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옆구리에 창이 찔려 피와 물이 나온 사건의 성취 인용문에 나온다(요 19:36).
신체의 존재로서 인간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유대교적 표현은 “살과 피”(sa.rx kai. ai-ma)로 사용되었다(마 16:17; 고전 15:50). “살과 뼈”라는 누가의 표현은 인간의 신체적 요소를 부각시키는 독특한 표현이다. 누가는 부활하신 예수의 존재가 살과 뼈가 없는 ‘영’만의 존재가 아니라, 살과 뼈가 있는 몸의 존재 곧 신체로 사셨던 나사렛 예수의 존재 전체가 부활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독특하게 제시한 것이다.
이 말씀은 도마의 의심 곧 “내가 그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 하겠다”(요 20:25)라는 의심에 대한 예수의 답변 곧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과 연결된다.
도마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은 못박혔던 “그의 손들”(ta.j cei/ra,j mou)과 창에 찔렸던 “그의 옆구리”(th.n pleura,n mou)를 부각시킴으로써 그의 손들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며 그의 옆구리가 창에 찔렸던 예수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그의 부활은 바로 그런 예수의 존재 전체가 지금 살아계신다는 것을 독특하게 표현한다.
이 말씀은 또한 “육의 몸”(sw/ma yuciko,n)이 있는 것과 같이 또한 “영의 몸”(sw/ma pneumatiko,n)이 있다는 바울의 교훈과도 연결된다(고전 15:44). “육의 몸”은 살과 뼈로 된 인간 존재를 가리킨다. 이것은 창세기 2:7의 인간 창조에 관한 말씀에 기초한 것으로서, 흙(신체)과 생기(영혼)가 불가분리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인간 존재를 말한다.
그러나 “영의 몸”은 그러한 신체의 존재인 인간이 초월자의 존재로 변형된 것을 가리킨다. 바울의 신학적 사상에서 ‘몸’(sw/ma)은 주로 전인 곧 신체와 영혼을 포함하는 전체적인 인간 존재를 가리킨다. 바울은 “영의 몸”이라는 용어를 통해 부활의 존재 역시 몸의 존재 곧 육의 몸으로 사셨던 예수께서 부활을 통해 초월자의 존재로 변형된 몸의 존재로 존재하고 계시다는 것을 표현했다. 바울은 이러한 부활의 존재를 “영광의 몸”으로 말하기도 했다(빌 3:21).
누가는 부활의 예수에게 살과 뼈가 있다는 것을 통해 바울의 “영의 몸”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부활의 몸은 살과 뼈가 없는 유령이나 단지 환상의 존재가 아니라 살과 뼈를 가진 몸의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의 살과 뼈는 육의 몸에 있는 살과 뼈가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니다. 부활의 몸은 이미 초월자의 존재로 변형되었기 때문에, 그 살과 뼈도 변형되어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이러한 변형된 존재를 “영의 몸”과 “영광의 몸”이라고만 표현한 반면, 누가는 살과 뼈를 가진 부활의 예수를 통해 육의 몸의 존재로 사셨던 공생애의 예수의 존재 전체가 부활하여 살아계신 것을 표현한다. 그는 또한 이것을 통해 부활은 영혼불멸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존재가 새로운 형태의 존재로 변형되는 것을 제시했다.
예수는 이것을 말씀하신 후에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가 말씀하신 것과 같이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보고 느끼도록 그의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여주셨다(눅 24:40).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고 그들과 함께 사셨던 바로 그 예수께서 지금 변형된 존재로 그들 앞에 서계신 것이다.
부활의 예수를 그들에게 보여주시는 것 자체가 보이지 않는 세계와 존재를 나타내는 초월자의 계시 활동을 가리킨다. ‘보여주다’(e;deixen)라는 동사가 바로 그러한 계시 활동을 나타내는 전문 동사 중 하나다. 부활현현 사건은 바로 부활의 예수를 제자들에게 나타내는 대표적인 계시의 역사였다.
예수의 계시 활동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아직 부활에 관한 확신을 갖지 못한 상태를 나타낸다: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눅 24:41상). “아직도 믿지 못했다”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너무나 믿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여전이 믿지 못하고 있었다”라는 해석이다.
둘째는 “이러한 놀라운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놀라워하고 있었다”라는 해석이다. 이것은 실제로 의심하고 있다는 말이라기보다 경이로운 일에 압도되어 놀라워하고 있는 상태에 대한 수사적 표현이다. 누가는 ‘놀라다’(qauma,zw)는 동사를 기적적인 사건들이나 놀라운 교훈에 대한 반응을 나타내기 위해 자주 사용했다(눅 1:63; 2:18; 4:22; 7:9; 8:25; 9:43; 11:14; 20:26).
이 구절에서 ‘기쁨’과 ‘놀라움’이 함께 사용된 것이 후자의 해석이 더 적절한 것을 나타낸다. 만일 그들이 실제로 믿지 않았다면, 그들에게는 ‘기쁨’이 없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점차로 성장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는 그들에게 부활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확신을 주기 위해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고 말씀하셨다(눅 24:41하). 그들이 예수께 “구은 생선 한 토막을 드렸다”(눅 24:42). 예수는 그것을 받으시고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눅 24:43). 누가는 “그들 앞에서”라는 전치사 구문을 통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생선을 잡수시던 공생애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생선을 잡수셨다”는 것은 초월자의 존재로 변형되신 부활의 예수께서 물질의 생선을 잡수신 초자연적 기적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점은 제자들과 함께 생선을 잡수시며 공생애를 사셨던 나사렛 예수께서 그 분의 존재 전체로 살아계신다는 것이다. 살과 뼈를 가진 신체의 존재로 사셨던 나사렛 예수께서 부활하여 신비하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존재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김광수 교수
침신대 신학과(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