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B반 김용환 담임선생은 일본에서 영어를 배운 영어선생이셨다. ABCD를 가르킨 다음에 “자 오늘은 인사부터 공부해야지”하시면서 아래와 같이 가르치셨다. “구뜨 모닝구 서(Good morning, Sir), 구뜨 아프타눈(Good afternoon), 구뜨 이브닝구(Good evening) 그리고 지셔이져 스쿠러(This is school), 잿뜨이져 빠꾸(That is bag), 이져 지셔라지요(Is this radio)” 등등으로 배웠다.
하루는 “자, 오늘은 얼마나 잘 공부했는지 누구부터 해볼까? 그럼, 반장부터 외워봐.” B조의 반장인 저는 일어서서 “One, two, 트리, 포,.....텐, 일레븐, 툴레븐(twoleven), 실레븐(sileven)” 하는데 그만 학급생도들이 배꼽을 쥐고 발을 굴리며 책상을 치며 웃음판이 벌어졌다. 중학교 입학할 때 시험성적이 두 번째로 좋아서 B학급 반장이 되었다.
“아이고 이놈, 반장이 저러니... 쩌쩌, ‘일레븐 툴레븐 실레븐’이 뭐꼬? 세상에 자 그만 앉아라, 웃는 놈들 너희들은 뭐꼬! 허참.” 그날부터 별명이 “툴레븐 실레븐”으로 당분간 불리워졌다. 아버지는 “우리 가정형편에 ‘딸’들은 초등학교 졸업시켜 시집보내면 되고, 그래도 명색이 ‘머슴아’들은 중학교 보내어 서양 글이라도 배워야지.” 하셨는데, 그날부터 그놈의 서양 글 영어는 취미를 잃고 대신 수학을 열심히 하게 됐다.
참말로 외국어 배우기가
어려서 천자문 배운다고 “하늘天 따地 가무솥에 누른 밥”, 일제 때 1학년에 일본 글, 중학교에 오케할로글, 고등학교에는 제2외국어로 독일어, 대학교엔 영문과에다 제2외국어로 중급 불어까지, 신대원에 들어와 헬라어와 히브리어 그리고 서반아어 3개월 독학까지 상말로 “그 놈의 8개국 외국어 공부에 이 놈의 대가리”가 깨어지게 골머리를 앓았다. 참말로 힘들다. 미국, 영국에서 태어났으면 자기 나라 말로 온 세계에 어디를 가도 끄떡없는데!
“그럼 A동사는 뭡니꺼?”
아버지는 맏아들이라고 6.25종전 후 본토 대구에 유학생으로 보내어 공부시켰다. 영남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배운 영어는 순전히 딱딱한 영국식 발음이었다. 영어선생은 자기가 영국 사람에게 집적 배운 영국식 발음 영어라고 가끔 자부심 있게 늘어 놓으셧다. 중학교에서 배운 일본식 영어발음 고치는데 힘들었다.
“야, 이 놈들아! 아무리 6.25전쟁 중에 3년을 힘들게 영어 공부했다 치더라도 그렇지! 세상에 B동사도 제대로 모르는 녀석들이 어떻게 고등학교에 들어왔노?” 그때 학급이 조용했을 때 저도 모르게 “선생님, 그러면 A동사는 뭡니꺼? B동사가 있으면 먼저 A동사부터 배워야지요!” 했더니 “아이고 참말로 내가 미치겠데이. 저놈은 웬 놈이고? 어디서 날라온 놈이고? 세상에 원 쩌쩌...”
이때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이거요, 멀리 동해바다 울릉도서 날라온 오징어 아입니꺼. 울릉도 호박엿을 많이 먹어서 그만 깜빡!”하자, “뭐라카노 이 자석아 너는 영덕 대게 꼬라지가! 까불어 제키면 오징어 다리 10개로 너 대게 같은 것은 오바싸서 잡아 먹는 꼴 볼라카나!” 하며 큰 소리로 대꾸했다.
“시끄럽다! 그만 못할까! 오징어고 대게고 두 놈이 수업시간에 싸움 붙을라 카나? 붙을 라면 수업 끝나고 둘이 나가 붙어!” 그날부터 여름 방학까지 놀리는 별명은 “어이, A동사” 아니면 “울릉도 오징어, 호박엿”으로 불리어졌다.
영어시험 100점
54년 여름방학엔 A동사 별명을 지우기 위해 그렇게 좋아하던 바다수영, 다이빙, 우럭잡기, 잠수로 전복과 해삼, 산딸기 따먹기 등 노는 것을 딱 접고 일본 사람이 쓴 소야규 영문법 책을 대구 양끼시장에서 사와 몇 번 통독했다. 눈앞에 영어문법이 잘 보이기 시작했다.
개학하자 첫 영어시간에 선생은 “모두 백지 한 장을 꺼내라. 시험치겠다.”하자. “선생님, 배운 것이 없는데 무슨 시험을 친답니까?” 하며 학생들은 웅성웅성했다.
“시험친다하면 종이나 끄집어낼 것이지 이 놈들이 무슨 잡소리가 많노? 방학동안 열심히 공부했나? 쳐 놀았나? 시험 치는 거야!” 시험내용은 문장의 5형식을 쓰고 그에 따른 예문을 들어 5개 쓰는 것이었다. 그것은 문법책 앞쪽에 나오는 것이라 점까지 잘 찍어 썼다.
그 다음 주 영어시간에 선생은 “1학년 3반에 한명국 이라는 학생은 누구냐? 일어나 봐라!” 혹시 ‘무슨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좋은 일이겠지’하고 일어서서 바쁘게 “이 학생이 3반에 혼자 100점을 맞았고 그 다음이 98점인 기우황 학생이다” 그날부터 2학기엔 “A동사” 별명은 사라지고 영어 잘하는 놈으로 부러움을 받게 되자 수학은 뒷전이 되고 영어공부에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기우황은 경북중학교 수석 졸업생인데 경고시험에 한번 이름 안 쓴 시험지 때문에 떨어져 영남학교를 왔고 후에 경북대학교에 박사교수가 되었고 과학장을 거쳐 총장이 되었다고 전해 들었다.
양공주 덕택에 코피
수학보다 영어에 흥미를 느껴 1학년 겨울방학 때에는 613쪽의 삼위일체 영문법 책을 두 번 통독하고 2학년 때에는 다이제스트(Digest)잡지 영어 강습소에도 다녔다. 반월당 침례교회 김기석 목사의 아들 김태림이 예태해 선배의 뒤를 이어 미국유학 준비를 하면서 보드맨(Boardman) 미군을 통해 당시 대구중학교에 있던 미 8군 사령부 수요일 영어예배 시간에 참석할 출입증을 받았다. 군종참모 아렉산더 대령은 친절한 침례교 목사였다.
한번은 성경공부 후 질문시간에 “예수 이름의 뜻은 아는데 그리스도라는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나름대로 문장을 잘 만들어 질문 했는데 세 번이나 군목은 못 알아 들었다. 그때 앞에 앉았던 소위 양공주 아가씨가 나를 돌아보며 “학생 보래이, 나한테 말해봐라.”해서 설명했더니 그녀의 말은 고개를 끄덕이며 금방 알아듣고 뭐라고 잘 설명해 주었다.
중학교선 일본식 발음영어, 고등학교에는 영국식 발음, 그런데 미군부대에선 미국식 ‘솰라 솰라’발음이라 알아듣기가 아주 힘들었다. 그날 저녁 ‘명색이 내가 양공주보다 못하다니! 영문법이고 강좌고 다 때리 치우고 말이 안통하면 안되겠구나!’ 깨닫고 새벽까지 하숙집에서 열심히 영어발음 공부하다가 그만 코피가 터졌다. 재빨리 일기장을 꺼내어 코피를 발랐다.
“오늘 새벽 처음으로 韓明國(한명국)이 드디어 코에 코피가 터졌다!”라고 썼다. 그때 코피 터지게 공부해본 첫 경험을 잊을 수 없다.
Yocum 박사 통역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9남매를 키우는 가정형편으로 꿈에 그리던 서울대학교 정외과는 시험조차 못치고 고향에 들어가 밥만 축내고 놀아 재키는 “놈팽이”가 됐다. 중국에서 40년 선교를 하고 대만을 거쳐 부산침례병원 제2대 원장 요컴(A.W Yocum)박사가 은퇴 후 귀국하지 않고 울릉도 도동교회에 진료소를 채리러 와서 환영예배에 통역할 사람을 찾았다, 부탁을 받고 저가 용기를 내어 10분 남짓 통역했는데 70고령의 발음도 문제였지만 무더운 여름 날씨에 평생 처음한 통역이라 뭐라고 통역했는지 등골에 땀이 흘렀다.
그 후 영어성경 공부반에서 부산서 따라온 조정도 집사와 정집사 등과 마가복음 3장을 공부할 때 원장은 나에게 신학교에 가면 학비를 보조하겠다고 했다. 2년전 대구교회에서 노재천 목사님과 포항 오면 김기석 목사님의 신학교에 가라는 권면을 듣기가 매우 싫었는데 또 그 소리에 성경공부반에 안 나갔다.
그런데 그해 가을 병들어 신학교에 가겠다는 서원기도로 치유 받고 이미 병원을 접고 귀국한 요컴 박사에게 편지하여 60년봄 목동산 신학교 예과에 입학한 후 도월태 학장을 찾아가 입학전에 요컴 박사의 약속하신대로 미국처럼 일반대학을 공부하고 정과에 들어오겠다고 촉구한 결과 교무과장 지대명 박사와 의논한 후에 요컴 박사가 보낸 장학금으로 나를 남장노교 선교부가 세운 대전대학(현 한남대학교)에 편입하기로 했다.
그런데 혼자만 보낼 수 없기에 졸업 후 신대원 복학 서약 서류를 제출하는 조건으로 조지용등과 편입시험에 합격하여 성문과에 입학했으나 나는 2학년 올라갈 때 그 골머리 앓는 영어영문학과에 전과했다. 그 후 이정희, 도한호, 정진황, 노윤백, 이흥관, 강선구, 이강호, 박성웅, 정익환, 이상대, 고용남, 최봉기 등등 10년간 신학교에서 장학금으로 일반대학(B.A)공부시켜 초기 교단의 일군들을 양성하게 되었다.
한명국 목사
BWA전 부총재
예사랑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