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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티 크리스천


작금의 한국은 어둠이 덮인 미로를 헤매는 길 잃은 아이와 같다. 침몰한 세월호가 바로 그동안의 대한민국의 실체였고 실재였다. 억울한 희생자를 셀 수 없이 만들어 내는 우리 사회의 모든 시스템은 사고 이전부터 옆으로 기울여진 채로 운항하였던 세월호 그 자체였다.


우리 스스로가, 인간 스스로가 그 본래의 주어진 참 된 모습을 지키며 살아낸다 해도 턱 없이 부족한데 우리는 어느 새 우리의 존엄성을 상실하게 하는 그릇된 주의’(-ism)에 함몰되어 살아왔다. 쟈크 엘룰(Jacques Ellul)이 그의 저서 뒤틀려진 기독교’(La Subversion du Christianisme)에서 주의(isme)라는 어미가 붙으면 정의가 명확한 원래의 개념에 어떤 새로운 것이 주입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사상에 주의라는 말이 붙게 되면 독창성은 제거되고 진부하게 되므로 하나의 삶 또는 사상은 그의 근본성과 항구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두드러진 고정관념은 이제 모호하게 변하기 쉽다.문제의 주의에 의해 원래의 내용은 교체되어 완전히 모순되는 경향으로 형성된 낯선 고정관념이 나타난다.”라고 주의에 대하여 설명을 한 것은 오늘 우리의 문제를 찾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이렇듯이 주의는 사상의 흐름인 시대적 사조를 이기적으로 형성한다. 그리고 시대인들은 그 시대의 사조에 종속되어 사고하고 행동을 한다. 사람들은 스스로 흔들림 없이 자기의 정체성을 지키며 본질적 삶을 일구어 낸다고 소리를 쳐보지만 그의 삶의 안팎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시대의 사조, 즉 어떤 주의에 깊이 물들어 그것을 맘껏 표현한다.


이슬람이 주장하는 삼위일체에 대한 코란의 견해도 신의 계시라는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이미 교주의 내면에 깊게 자리 잡은 그 당시 마리아를 신격화한 이단적 사조 컬리리디아니즘(Collyridianism)과 아라비아 지방에 널리 퍼져 있던 예수의 몸이 물질이 아닌 유령, 즉 인간의 환영을 가졌다는 영지 주의적 이단사조 도케티즘(Docetism)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이와 같이 오늘 이 시대도 한 사조의 덫에 단단히 걸려 있다. 모든 의식구조, 사고방식, 언행심사를 형성하게 하는 사조는 다름 아닌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형성하여 살게 하는 내면의 모든 것을 소리 없이 조정하는 것이 진정한 자신, 자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우리가 인지하고 있듯이 우리는 포스트모더니티들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티 크리스천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해체주의, 축소주의, 상대주의, 다원주의 등의 특징으로 뒤섞여 있는 복합적인 현대 사상이다.


절대성을 상대성으로 유일성을 다원성으로 해체하고 축소한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가 절대적인 진리로 믿어왔던 복음,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은 예수 외에도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다원주의가 현대사상을 이루며 복음과 기독교에 도전한다.


반대로 기독교는 혼란과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지금 곳곳에서 그 얼굴을 내민다. 그동안은 은밀하고 조용하게 어둠 속에서 이루어지던 각종의 타락된 죄악의 문화들이 이제는 태양 아래로 당당히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보란 듯이 죄의식도 없이 활개 치더니 이제는 대중문화의 하나로 굳게 자리 잡으며 이것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과거를 삭제하고 대신 호의적으로 단순한 동정함이 아닌 그들의 당당한 용기를 칭찬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진리와 이성이 아닌 감성과 본능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일탈들은 그동안의 규범들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며 향락과 소비주의를 탐닉한다. 동성애에 대하여 굳이 성경을 말하지 않아도 도덕과 윤리성, 그리고 인간의 참된 가치적 측면에서도 옳지 않은 성적 선택이고 범죄임에도 동성애자들은 이제 보라는 듯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간다.


포스트모더니즘 아래서 그들은 틀리지 않다. 동성애도 그렇게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들처럼 존중받아야 하는 누구도 거부하기 힘든 인권이라는 기준을 적용함으로 틀림이 아닌 다름이라는 다양성의 조명을 비추어 커다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한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신앙 안에서도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씀을 따라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이며 경험적인 것을 중시하는 초자연적인 체험을 추구하는데 몰입하면서 성경에 근거한 신앙이 아닌 감정적, 즉 주관적인 관점에 의한 해석과 자기의 소견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자기 입맛에 맞는 교회를 찾아다니고 자기 기분(,frame)에 맞는 설교자를 찾아다닌다.


그러다 보니 일부 교회와 목사들은 찾아온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는 상품(설교)을 준비해 놓고 쇼핑을 맘껏 즐기게 한다. 교회가 가진 절대성을 스스로 상대화 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보다는 자기의 생각을 인정받거나 동의 받는 것에 이용하고, 그것이 충족되면 은혜로 여긴다.


열린 예배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성령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더 불편함으로 다가오게 하는 이 모든 현상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내면을 집어삼킨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탄의 사상 때문이다.


진정한 회개가 없이도 단순한 반성으로 죄의식을 털어버리게 하는 교회의 넓은 아량은(?)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다. 더 이상 절대적 진리는 없고 상대적 진리(?)만이 흐느적거리는 강단의 화려함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셨던 주님의 간절한 소망은 이미 사망선고를 받아 놓는 것이나 다름없다.


스스로 복음을 그럴듯한 해석으로 해체하고 상대화하여 여러 종교들이 주장한 교리들 중 하나로 전락하고 있다. 이제는 연합이라는 이름아래 종교혼합의 손을 잡고 같은 방향을 향해 세월에 몸을 맡긴 채 흘러가면 된다. 아주 편하게. 부딪침도 갈등도 충돌도 없이 그저 세상의 향락을 함께 즐기면서 세상을 정당화 시켜 주면 된다. 그러면 교회는 세상의 영웅(?)이 된다.


300여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세월호 침몰 사건은 결코 우연의 일이 아니다. 절대적인 생명이 상대화 되고, 각자의 사명이 이익에 따라 버릴 수 있는 소모품이 된 것은, 이미 생무가 장 속에서 장아찌가 된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에 푹 절여진 탓이다. 아까운 생명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는데도 자기 이익에 따라 생명을 계산하는 이 통탄할 오늘의 풍조는 결국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군상들을 전면에 등장 시킬 것이다.


톰 라이트가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Evil and the Justice of God)에서 포스트모더니티를 특징짓는 사회 문화적 현상 중 하나가 중대한 재앙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는 것이라고 일갈한 것처럼 결국에는 이번 세월호 침몰 사건도 실제적인 책임 소재의 영역에서 내 책임이라고 내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 상식이고 진정한 가치고 바른 미래다. 그리고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 시대의 병든 사조를 거역하며 십자가를 지는 길이다. 그 일을 잘못된 사조와 시대에 저항할 사명을 가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한다.


거센 물결을 거슬러서 자기 태어난 곳을 찾아 2만여km를 여행하는 연어처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복음으로, 다시 십자가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면 돌아온 연어에 의해 다시 수많은 연어들이 태어나듯이 다시 예수그리스도 안으로 돌아온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이 땅에 진리를 따라 복음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교회들, 세상의 모든 사사건건에 대하여 책임을 질 줄 아는 이들이 번성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이 땅에 침몰하는 세월호가 사라질 것이다.

 

계인철 목사

광천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