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보다는 무엇이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풍요롭다. 사람들은 없는 것의 목록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자빈(自貧)하게 된다. 나는 내 주변에 온통 있는 것 밖에 없다는 것에 지극히 만족해한다. 나는 원래 두 귀를 갖고 있었는데 오른쪽 귀가 영 먹통이 되어 버렸고 다행히 왼쪽 귀만 가지런히 청각 작용을 하고 있다.
젊을 때는 들어야 할 과제물이 많으니 두 귀가 성해야 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늙어서는 굳이 들어야할 것들이 별로 없이 한귀로만 들어도 되지 않느냐는 하나님의 배려인 것이다. 노인들이 한쪽귀가 안 들린다고 고민하는데 그땐 자기가 꼭 듣고 싶은 이야기만 성한 귀로 들으면 될 것 아니냐고 나는 타이른다.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들으면 한쪽 귀만으로도 족할 것인데 굳이 듣지 않아도 될 남의 이야기를 듣자고 욕심(?) 때문에 스스로 불구자연(不具者然)하고 애태우고 있으니 얼마나 딱한 일인가? 아직 나에게는 들을 귀가 없는 것이 아니라 들을 수 있는 귀가 하나 있다는 소유감의식(所有感意識)이 있다.
만약 두 쪽 귀가 다 먹통이라면? 그땐 들을 것이 더 이상 없다는 사인으로 보고 듣지 않으면 속편 할 게 아닌가? 아주 세상소리 안 듣는 것, 그것은 세상을 향한 책임에서 해방 받으라는 하나님의 배려가 아닐까? 그땐 소리를 들으려하지 말고 눈으로 보려하면 되는 것이니, 우스운 이야기로써는 불교의 소위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면 어떨까?
눈의 입장도 마찬 가지다. 눈이 어두워지면 덜 읽으라는 것이니 편안히 눈감고 그동안 젊은 시절 눈 밝았을 때 읽은 것을 반추(反芻)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안 뵈는 것을 굳이 억지로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도 일종의 무리다. 그러나 나는 좀 어두운 눈이라도 지금 소유하고 있다는 것. 나는 눈의 소유자다.
나는 왼쪽 다리의 아킬레스근이 절단되어 절룩발이 노신사가 되었다. 걸음도 한보 가량 느리지만 천천히 걷는다. 나는 절룩발이 다리를 갖고 있다. 나는 성한 다리와 불구 다리를 갖고 있다. 이러나저러나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은 좋은 것이다.
불교의 어떤 명승이 “無所有”로 인생관을 취해서 자기는 무소유자라고 하지만 그도 “무소유”란 인생관을 생명을 다 할 때까지 소유하고 있는 자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그에게 “당신은 무소유의 소유자요”라고 지적해 준다.
주변을 살피니 온갖 것이 다 있다. 산과 들과 강과 바다와 하늘과 땅, 온 우주를 다 갖고 있다. 공기, 물, 흙, 곡식, 채소, 육류 등 식료품이 있다. 첫째로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고 손자가 있고 친구가 있고 교우가 있고 온통 모든 게 있다. 나에게는 온통 있는 것 밖에 없구려. 또 무엇이 있더라?! 그려.
나는 나를 소유하고 있다. 나는 나의 소유자?! 또 무엇이 있더라! 우주의 주관자요 인류의 구원자 하나님이 계시고 나는 그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고요. 하나님을 소유한 자, 그리고 하나님에게 소유당한 자, 이렇게 하나님과 꽈배기 인생을 사는 자요 온통 안 가진 것이 없이 다 가졌다니까. “없는 것”도 소유한 자이니 만큼 “없는 것”도 그 소유자에게 소유당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1~23)
水流(수류) 권혁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