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 예수잔치
도안교회 다음으로 제대 후 신대원에 복학하면서 목회자가 없어 문을 닫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 1968년 9월초에 충북 옥천군 이원면 강청리 이원침례교회를 찾아가니 주일에 정수룡, 김찬순(현 순복음교회 목사), 이기숙, 등 중졸 청년 주교교사와 15여명 어린이 그리고 교회에 처음 나온 한이섭 청년이었다.
다음해 한이섭군을 청년회장으로 임명한지 얼마 안되어 이종성 군을 통해 알아보니 불교신자인 강청리 이장이 교회에 나가지 말라 해서 안 나온다고 했다. 왜냐하면 몇 년전에 육영수 여사가 이원교회당에서 30미터 떨어진 정자나무 속에 있는 작은 절간에 충북과 옥천군 고관들 공화당 간부와 이원면 유지들이 떼들 지어 함께 다녀갔다는 것이다.
불교아성에서 지방의 유지들을 붙잡지 않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성경의 잔치에 대한 주님의 말씀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떠올라서 “돌아오는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생일잔치로 이원면의 모든 기관장과 유지분들을 초청하여 3부로 나눠 행사를 하겠으니 무엇이든 기도중에 뜻을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취지를 밝혔더니 남녀 청년을 합한 40여명이 모두 기쁘게 “아멘”했다. 이렇게 해서 “예수잔치 복음전도”의 시발점이 되었다.
한 번은 대전 갔다 오는 길에 이원역 앞에 앉은 몇 몇 아주머니 중에 너무 마른 분이 있어 다가가 “아주머니 보니 폣병이 오래된 것 같은데 도랑건너 강청리 이원교회에 나오셔서 예수 믿고 병 고치시지요. 나는 그 교회 한전도사입니다.”했더니 깜짝 놀랐던 손씨 아주머니가 다음 주 교회에 나온 지 두 달만에 각혈하던 폐결핵도 감쪽같이 낫고 체중이 6Kg이나 늘어났다. 손씨 아주머니가 씨장닭을 새벽기도 오는 길에 바쳐서 다른 교인들도 도전을 받고 음식준비는 잘 되었다.
구주 성탄절 1부 예배 후 2부에는 유지들의 자녀들이 섞인 성탄축하 공연에 초청된 분들이 들어오기도 하고 눈이 오고 추워도 불교신자라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으나 이성예, 김정화, 유정실 집사등이 한복 차림으로 초대되어 오신 분들을 친절하게 모셔들였다. 모든 가정이 준비해온 음식으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가득히 채웠는데 소, 돼지, 생선, 닭까지 육해공이 다 모였다.
“공사다망하시고 눈이 많이 내린 추운 날씨에도 관내 모든 기관장과 유지분들이 예수잔치 초청장을 받고 30여명이 자리를 빛내주셔서 정말 감사하며 졸찬이지만 마음껏 잡수시기 바랍니다.” 식사가 끝나갈 대 “졸찬이지만 성찬으로 잡수셨으니 주의 성찬으로 성도들이 준비한 포도즙을 한잔씩 받으시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했더니 “야! 봐라, 한전도사는 정말 신식 목사야! 멋쟁이 목사 맞다! 우리가 배째지게 실큰 먹고 또 예수 믿고 안 믿고는 둘째고 성찬 포도주를 받아 마시자!”
헤어지기 전에 교회당 지부장과 면장의 감사 답사가 있었고 저들이 모여 의논하더니 “목사님, 우리가 초청장을 받을 때는 졸찬을 준비했다더니 너무 성찬이라 예수님 생일 잔치에 빈손으로 온 것이 잘못되었슈. 갖고온 돈이 너무 적어 나중에 뜻을 전하겠어유” 굽실굽실 인사를 하고 돌아갔는데 몇일 후 중학교 선생의 두달 월급인 5만원을 모아 보내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들으니 지부장 유씨는 미국 이민가서 신앙생활을 하고 믿다가 낙심한 옥천군 공부실잘 한응섭씨는 다시 신앙생활하고, 아내인 이성예 집사를 핍박하던 농협조합장 주재경씨는 신앙생활하여 교회당 안의 의자와 강대상을 봉헌했다고 들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126:5~6)
성탄 이브 예수잔치
기도의 응답으로 빈들판인 사직동으로 옮겨 지하 30평을 짓고 1층을 다 지었을 때 구주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해마다 해온대로 1978년 크리스마스 전날 저녁을 “예수잔치”로 선언하고 준비했다. 그해는 “오이코스 전도 예수잔치”로 가족, 친지, 친구, 직장동료를 인도해 오기로 하고 여집사 20여명은 각기 다른 음식을 해오고 사택에선 밥과 국에 김치 같은 것만 준비했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좋은 뷔페식사였다. 3부로 나눠 행사를 했는데 먼저 식사하고 성탄전야예배에 이이서 교회학교가 준비한 축하행사로 이어졌다.
한 예를 들면 윤지영과 동생 은영이가 교회에 나오면서 어머니 정덕 자매가 한주에 2만원어치 약으로 살았는데 교회에 나와 우리와 함께 심방을 하면서 낫게 되자 매일 술에 취하여 집에 들어오는 남편을 그날 인도하여 아들 석민이까지 성가구원을 이뤘다.
남편 윤병조씨는 술 끊고 신앙생활도 잘하여 아내따라 집사가 되었다. 여전도회장 정덕 집사는 남동생이 복음병원에 입원하자 부부가 함게 찾아와 200만원 종각봉헌을 하였고 나는 창자의 절반을 잘라낸 이튿날 남동생이 있는 복음 병원을 심방하여 기도한 후에 나오자 일주일 동안 링겔주사만 맞고 먹지 못하는데 자장면 한 그릇을 먹어 병원 홀딱 뒤집히는 기적도 체험하였다. 가족은 지금까지 신앙생활로 큰 축복을 받았고 창자 절반을 잘라낸 정군은 지금도 신앙생활하며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부활절 예수잔치
“돌아오는 부활절을 예수잔치 주일로 지키겠습니다.” “돌아오는 4월 19일 주일은 부활절로 예수님 오신 예수잔치를 합니다.” “부모님 회갑잔치를 생각하시고 믿지 않는 이웃이나 친구 직장 동료 및 불신자들을 부활절에 모셔와서 극진하게 영적 양식인 말씀과 육적 음식으로 예수님 대접하듯 ‘예수잔치’를 성대하게 차립시다!”
87년 2월로 몇 주를 이렇게 광고를 하니 쑥떡을 먹었는지 교인들은 한목사가 부임한 지 몇 달이 안되었는데 의논도 없이 예수잔치가 무엇인가? 쑥덕쑥덕했고 결국 집사들의 질문이 늘어났다. 기회를 잡아 운영위원회를 열어 취지를 설명했으나 첫째는 거금 200만원 예산 문제요, 평상 주일의 결신자 관리지속만 잘해도 계속 성장하니 예수잔치 뒤로 미루고 교회부지 환수에 골몰하고 힘써달라고 했다.
반대여론이 팽배했으나 예산은 추경의 필요 없이 담임목사가 책임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예수님 모신 구령의 잔치로 하며 부지환수는 담임목사가 최선을 다해 해결할 것으로 세가지 모두 잘 설명하여 설득했다.
40일을 앞두고 먼저 전교인 기도와 전도대상자 찾기에 주력하며 교회의 모든 모임에서 초점은 예수잔치 총동원 전도주일 5부에배로 준비한 결과 대상자 카드를 100장 갖고가서 70명을 인도한 집사도 있었다.
부활절 새벽기도 끝난 뒤 8시, 10시, 12시, 2시, 4시로 안내위원과 상담위원, 주방봉사자 등 서울교회 생긴 후 최고로 큰 복음잔치가 벌어져 교인 포함 3,452명 출석에 상담카드는 737명이었고 한 달 후 그 후의 침례자는 160명이 되었다.
20년간 20회 예수잔치에 참석하여 상담카드 결신자 수는 5,300명에 이르렀다. 쌍문교회(우재돈), 충신교회(박종순)도 우리의 예수잔치를 했고 나는 워싱턴 연합회와 북가주 연합 부흥회에서 예수잔치 세미나를 했다.
한명국 목사
BWA전 부총재
예사랑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