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제자 목사가 자기교회 어떤 비만 성도가 있기에 만날 때마다 음식조절이니 운동이니 하는 것으로 계속 충고했건만 통 말을 들어주지 않고 계속 뚱뚱보가 되어 가기에 어느 날 작심하고 독설(毒舌)의 침을 넣었다고 했다. “당신, 똥돼지 될거요?”
그 말을 들은 비만증 교인은 심장 끝에까지 찔러오는 예리한 칼날을 의식했다고 했다. 이 칼끝이 조금만 밀어오면 심장이 갈라지는 순간이다. 그는 작심했다. 비만 중에서 해방되어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 맞이는 뻔한 사실이다.
그는 지금까지 담임목사의 점잖은 충고를 그냥 건성으로만 들었던 것이다. 목사도 책임을 느꼈다. 보통 부드러운 말로서는 의식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마침내 사람이 되랴 똥돼지가 되랴? 선택하라. 그 뚱보교인은 왜 내가 똥돼지가 되냐고 슬펐다. 각오했다. 음식조절, 운동 그리고 복약 등으로 마침내 날씬한 여자가 되었다.
목사는 진리를 전해야 한다. 찌르는 율법으로 심장부를 가르고 뼈 속 깊이 죄인임을 느끼도록 직언(直言)하기를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언제까지 비만증 환자교인을 두고 살 것인가? 목사는 영육보호자가 아닌가? 오늘 날 성도들의 영적상태에 대해서 목사는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는가?
사람들이 평안치도 못한 되 평안하다고 거짓말 하고 있지는 않는가?
“만군(萬軍)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豫言)하는 선지자(先知者)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默示)는 자기(自己)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恒常) 그들이 나를 멸시(蔑視)하는 자(者)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平安)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自己) 마음의 강퍅(剛愎)한 대로 행(行)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災殃)이 너희에게 임(臨)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렘23:16,17)
파수군 노릇하고 집개가 짖지 않고 졸고만 있지 않는가? “그 파숫군(把守軍)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無知)하며 벙어리 개라 능(能)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者)요 누운 자(者)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者)니 개들은 탐욕(貪慾)이 심(甚)하여 족(足)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者)요 그들은 몰각(沒覺)한 목자(牧者)들이라 다 자기(自己)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者)이든지 자기(自己) 이만 도모(圖謀)하며”(사56:10-11)
목사에게 왜 칼을 주었는가? 왜 율법의 칼을 주었는가? 왜 진리의 칼을 주었는가? 왜 복음의 칼을 가졌는가? 칼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지 않았는가?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당할 것이로다”(렘48:10)
먼저 목사들은 왜 모든 사람을 행해 율법의 칼로 찌르려 하지 않는가? 律法의 의미를 똑바로 전하지 못하는 자는 복음의 의미도 똑바로 전하지 못함은 물론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왜 저들의 상태를 말해 주지 않고 주변을 돌고 있는가? 의사라는 양반이 앞에 앉은 환자에게 왜 바른 진단을 말하고서는 그 처방치유를 하지 않으려 하는가?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3:9)
“당신들은 유구무언자요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소”라고 왜 말 못해 주는가? 그리고 어서 처방책을 들려주지 못하는가?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4)
목사는 찌르는 칼 율법과 치유하는 칼 복음의 소유자라는 막강한 영적의사가 아닌가?
이 제자 목사는 왜 일찍 비만성도에게 “똥돼지”라는 말을 못해 주었던가를 무척 후회하면서 “목사님, 그렇지요” 라고 동의를 구해왔다. 나는 그냥 고개를 수 없이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