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영화는 흥미와 재미로 감상하는데 관람 내내 오락적 요소가 깔리지 않는 영화를 누구나 좋아할까. 흥행성이 없는 영화는 외면당한다. 흥행 영화에 대해 정면으로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란 영화가 도전장을 내었다. 도정일 문학 평론가가가 그의 “쓸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이라 책에서 다음과 같은 논평을 내었다.
“--- (희생 영화의)이런 요소들은 우리처럼 할리우드 영화의 문법에 단단히 길든 관객을 미치도록 답답하게 만든다”
이어 도정일 작가는 희생이란 영화가 한국 관객을 지루하게 할 수십 가지의 이유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희생” 영화에 나타나는 등장인물들은 누구나 보아도 눈을 즐겁게 할 용모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영화의 주 스토리는 한 소년이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것이다.
산나무가 아니라 죽은 나무에 물을 줘서 살리겠다고 하는 이 바보의 바보스러운 장면이 지루 답답할 수밖에 없다는 것. 주 인물 알렉산더는 정신병동의 만년 환자 같고, 그에게 구원의 여인이 되어 주는 마리아는 땅에서 금방 솟아나 아직 세수도 못한 여자처럼 주근깨 투성이고. 전편을 통해 이렇다 할 액션도, 로맨스도, 극적 사건도 없고, 서사구조는 종잡을 수 없게 뒤범벅이고. 아주 재미 머리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이 영화.
이 영화에서 죽은 나무는 인간의 탐욕이 죽인 자연, 파산한 인간의 집, 고갈된 정신성의 상징이다. 문명의 모순은 그 문명의 덫이다. 문명이 갖고 온 황폐한 세상은 죽은 나무다. 이 죽은 나무, 곧 황폐한 세상을 바보 천치같이 물을 줘서 살려보자는 것인데, 이는 살릴 수 있어서 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젠 물을 줘도 못 살린다는 하나의 경고이다.
이런 나무에 물을 주는 노력이 일종의 “희생”인 것이다. 인류가 잘못한 것을 복구 하자니 이렇게 힘겨운 희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비인기 무재미 영화 “희생”에서 놀라운 교훈을 발견했다. 흥행성을 거부하는 예술적 작업이 “현대예술의 사회적 소임”이라고 타르코프스키는 생각한 것 같이 복음 선포자의 현대적 소임도 흥행성과 세상성에 찌든 교회를 향해 도전하는 것이라고 본다.
오늘 날 교회는 흥행성에 빠져있다. 흥행성에 빠진 교회에게 무흥행성 비인기 설교를 한다는 것은 마치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지루하고 따분한 일 같지만 그래도 물을 줘야하듯 해야 한다고.
율법과 시장성으로 질식하고 있는 교회를 향해 복음과 경건성을 이야기 할 때 이미 기존 교회에게는 지루 답답함을 느낄 것이 뻔하다. 저들은 복음이야기를 하면 외면한다. “희생”이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복음선포 행위 그것이다.
죽은 나무에 물을 준다는 것은 여간한 희생정신이 아니고서는 해낼 수 없는 바보 천치의 행위인 것이다. 그게 참된 “희생”이라는 것인데 성경은 율법에 대치되는 복음선포 곧 십자가의 도가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복음선포 자는 남이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자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복음선포 자는 사람들의 흥행을 맞추는 자가 결코 아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水流(수류) 권혁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