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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표절, 어디까지인가?


설교표절이 지금 조국교회의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생명언어설교연구원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90%의 목사들이 표절설교를 한다고 한다. 많은 목사들이 무심하게 다른 목사들의 설교를 베껴서 설교한다. 그러다 교인들에게 발각되어 교회에서 면직을 당한 목사들도 있다. 또 그 문제로 교회가 분란에 휩싸인 경우도 있다.


어느 대형교회 담임목사는 설교표절을 했다가 교인들에게 알려져 설교를 중단하고 몇 개월 동안 근신한 일도 있다. 이대로 묻어두어야 하나 민낯을 드러내야 하나? 나는 어떤가. 당신은 어떤가. 어디까지가 표절인가?


우연의 일치로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작가에게도 표절의 책임을 뒤집어씌워서는 안 된다. 사상뿐 아니라 말도 표절될 수 있다한때 표절 시비에 휘말린 바 있는 작가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의 말이다. 표절의 범주를 상당히 느슨하게 잡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표절시비는 종종 있어왔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1955년 보스턴 대학교에서 조직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보스턴대학은 1989년부터 1990년까지의 재조사를 통해 킹의 논문 가운데 삼분의 일이 졸업생의 논문을 베낀 사실을 적발해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라는 그 유명한 킹목사의 설교도 아치볼드 케리 주니어(Archibald Carey Jr.)라는 흑인 설교자가 1952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행한 연설을 표절한 것이었다. 베끼고 싶은 본능, 모방하고 싶은 본능, 이것은 인간 속에 내재된 주체할 수 없는 속성인 것 같다. 이쯤에서 표절의 의미를 추적해보자.


표절(剽竊; plagiarism)’이란 다른 사람의 저작물 일부나 또는 전부를 몰래 따다 쓰는 행위를 말한다. 표적(剽賊)이라고도 한다. 다른 사람이 창작한 저작물의 일부 또는 전부를 도용해서 자신의 창작물인 것처럼 발표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학문이나 예술의 영역에서 출처를 충분히 밝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저작을 인용하거나 차용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기본적으로는 도덕적·윤리적 문제로 간주하는 경향이 짙다. 표절(plagiarism)’은 다른 사람의 창작물을 자신의 것으로 도용한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의 창작물을 본 따서 나름대로 재창조한 모방과는 구별된다.


학계에서 논란 내지 문제가 되고 있는 표절의 유형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창시자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고 전체나 일부분을 그대로 또는 피상적으로 수정해서 그의 아이디어(설명, 이론, 결론, 가설, 은유 등)를 도용하는 아이디어 표절이 있다. 저자를 밝히지 않고 다른 사람이 저술한 텍스트의 일부를 베끼는 텍스트 표절이 있다. 텍스트 표절이 가장 전형적인 표절 행위이다.


다른 사람이 저술한 텍스트의 일부를 조합하거나, 단어를 추가 또는 삽입하거나, 단어를 동의어로 대체하여 사용하면서 원저자와 출처를 밝히지 않는 모자이크 표절이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과 생각임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실을 왜곡하는 아이디어 왜곡도 표절이다. (<표절과 저작권 침해>, 커뮤니케이션북스)


이렇게 세상에서도 표절은 표적(剽賊)이라 한다. 한마디로 저작물 도둑질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교의 표절은 더 엄격한 잣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쉬쉬하던 설교표절 문제를 공론화한 모임이 있었다. 한국기독교 목회자협의회가 주관한 열린 대화 한마당이 그것이다.


최초로 설교표절 문제를 공개석상으로 끌어낸 모임이었다. 그 자리에서 설교표절의 의미와 기준에 대한 다양한 발제들이 있었다. 많은 참고가 되기에 여기 핵심내용들을 인용해본다

 

설교는 강한 현장성과 즉각성 때문에, 인용한 내용이나 참고한 자료의 근거를 일일이 밝히는 일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인용근거를 밝힌다 하더라도 도덕적 비난은 면할 수 있겠지만, 그 설교가 진정한 설교이고 효력 있는 말씀의 증언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정주채 목사)


다른 사람의 설교를 통째로 베껴서 설교하는 경우는 물론, 다른 사람의 설교 아웃라인을 그대로 베낀 경우, 아웃라인은 자신이 구상했어도 속 내용은 몇 편의 설교를 짜깁기한 경우, 어느 설교자의 깊은 묵상에서 나온 문장을 마치 자신이 묵상한 결과인 것처럼 출처 없이 말하는 것 모두가 표절에 해당된다”(안진섭 목사)


설교자가 작심하고 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자료로부터 받은 영향을 무의식중에 표출한 것인가 하는 의도성’, 표절의 행위가 단회적인가, 반복적인가 또한 그 상황 속에서 불가피한 행위였는가 아니면 습관적인 것인가 하는 반복성그리고 남의 설교를 기술적으로 자신의 것처럼 포장하는 위선의 유무가 설교표절의 기준이다”(한진환 목사)


또 발제자들은 설교 표절의 근본요인에 대해서도 다각도로 의견을 쏟아냈다. “성도들이 설교에 은혜를 받고 믿음이 성장하면 그것으로 되는 것 아니냐, 표절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목회자들이 의외로 많다. 신학교에서도 설교 표절을 심각하게 다룬 적이 없다. 이런 잘못된 인식 때문에 설교자들은 설교 표절을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설교자의 은사가 없거나 신학교에서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해서 표절의 유혹을 받는 경우도 있다. 설교자의 삶이 담긴 증언이 돼야 할 설교가 교회성장의 방편이나 도구로 전락해, 남의 설교를 표절해서라도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한다”(한진환 목사)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며 설교할 수 있는 기본적인 능력과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설교는 계속해야 하고 준비는 잘 안되니 남의 것을 베끼는 것이다. 설교 표절 문제는 좀 더 원천적으로 말하면 신학교육의 문제요 신학교 난립의 문제다”(정주채 목사)


왜 표절을 하는 것일까? 발제자인 정주채 목사는 그 이유를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첫째는, 설교 횟수가 너무 많아서다. 한국교회의 경우 목사들이 공식적으로 해야 하는 설교만 해도 한 주간에 10회 이상이다. 작은 교회들은 담임목사 한 사람이 이 설교들을 다 맡아서 해야 한다. 그러니 항상 열심히 준비해도 역부족일 경우가 많을 것이다. 여기서 새벽기도회에서 하는 설교를 정식 설교로 간주하지 않는다하더라도 한 주간에 세 번 이상 설교해야 하는데 이 정도만으로도 너무 무거운 짐임엔 틀림없다.

둘째는, 게으름이다. 설교자가 말씀묵상과 기도생활에 게으른 것이다.

셋째는, 정직하지 못한 성품 때문이다. 정직함은 인격의 기초다. 이는 지도자에게 가장 강하게 요청되는 성품이다. 그런데 이것이 결여된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겠는가?

넷째는, 설교자로서의 기본능력과 자격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그러면서 정 목사는 표절설교가 가져오게 될 무서운 결과를 심각하게 경고했다. 먼저, 설교표절은 설교자 자신을 영적으로 황폐하게 만든다. 설교는 기록된 말씀이 설교자의 인격과 삶을 거쳐 선포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설교자 자신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연구하고, 그 말씀을 삶에서 실천하여 경험하고 그런 가운데 자신이 은혜 받고 그 받은 은혜를 성도들에게 흘려보내야 한다. 그런데 설교자 자신에게 이런 노력도 몸부림도 없이, 그 말씀이 의의 말씀임(5:13)을 전혀 경험치 못하고 남이 준비한 것으로 설교하면서 사역을 때운다면 그 목사의 영혼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의 믿음이 어떻게 되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황폐하게 되고 말 것이다.


다음으로, 이런 설교는 교회를 황폐하게 만든다. 베껴서 하는 설교가 어찌 성도들에게 은혜가 되겠는가? 자신의 인격과 삶을 통과하지 아니한 말씀에 무슨 확신이 있으며 능력이 있겠는가?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전하는 말씀, 자신이 은혜를 경험치 못하고 전하는 말씀이 어찌 성도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며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결국 성도들이 지치고 허약해지고 교회가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는 게으르고 악한 목사들 때문에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말씀사역이 제대로 안되면 대사명의 성취는 불가능해진다. 대사명은 모든 민족을 제자삼아 침례를 베풀고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이고, 이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성취를 위한 지상명령이다.


이 명령은 보냄 받은 자들의 말씀 증언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설교자들의 불경과 불충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부터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으면 구원의 복음이 어찌 세상에 능력 있게 전파되겠으며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우리의 현실 앞에 한숨부터 나온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까? 한목협 모임에서 논의된 것들의 정당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약간은 숨 쉴 수 있는 대안은 없는 것일까?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숨이 막힌다. 이렇게 생각하면 설교의 적이 될지 모르겠다.


다른 설교자의 설교개요를 베낀 것도 표절이라고 하는데, 교회사에 나오는 대가들의 설교개요를 가져오는 것도 표절일까....... 설교의 왕자, 스펄전이 형제 설교자들을 위한 설교개요집<Spurgeon’s Sermon Notes>을 출간하면서 한 말이 있다.


나의 설교 노트는 단지 설교 준비를 도우려는 것이다. 친구의 도끼를 빌어도 그것으로 자기의 일을 하는 한, 책망 받지 않는 것처럼, 자기에게 제시된 주제나 자기 앞에 있는 생각의 씨앗들을 발견하여 그것을 가지고 마음을 다하여 설교하는 사람은 결코 비난할 필요가 없다


마틴 로이드 존스와 스펄전의 설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근두목사의 이야기다. “체계가 서지 않은 어설픈 설교를 하느니 차라리 로이드 존스의 설교들을 요약하고 묵상해서 설교하는 게 휠씬 더 강단을 풍요롭게 하지 않을까?” 판단은 각 자의 몫이다.


창조적 모방은 어떤가? 문학작품 등에서 지적인 도둑 행위인 표절은 모방(模倣)과는 상이하게 부정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모방이란 사물을 본 따고 그것을 보고 기쁨을 느끼는 창조로 향하는 인간본능으로서 긍정적인 요소이다. 모방은 창조의 전() 단계이지만 표절은 창조의 적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詩學)에서 말한 것이다.


모방(imitation)이 있어야 창조(creation)가 있는 게 아닌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모방하던 습작생, 라파엘로는 다빈치에 버금가는 명화를 남겼다. 설교표절 행위의 기준을 설정하려다 보니 그 준거틀이 너무 도식화된 것은 아닌지, 그 결과로 형제 설교자들을 도매금으로 도둑으로 몰아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설교표절을 용인하거나 봐주자는 게 아니다.


작금의 목회 현실도 조금은 포용하면서 가면 어떨까 싶어서다. 설교표절,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코람 데오(coram deo)하면서 풀어 가야할 뜨거운 감자이다. 설교! 목사의 영광, 목사의 십자가! 조국강단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인도하심이 있기를 소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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