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월 9일 긴급조치 발동 후 2월 21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기도하고 나오는 나에게 검은 복장의 젊은이가 인사를 하고 이름을 물어서 대답하자 잠간 얘기할 것이 있다고 해서 루삥집이지만 들어오시라고 했더니 밖에 잠깐 나가자고 해서 길가로 따라 갔더니 검정색 새단 차에서 또 다른 한 사람이 나오더니 뒤쪽 좌석 문을 열고 밀어 넣어 들어갔다.
놀란 나는 말을 잠깐 하자더니 왜 차에 태우느냐고 했더니 우리는 중정 기관에서 나왔는데 가보면 안다고 하며 나를 태우고 부산 수영에 있는 군용공항으로 데려가 비행기에 태우고 한 시간 후에 서울 김포공항에 내렸다.
큼직한 핸드폰으로 본부에 연락하기를 잘 압송했다고 하자 지시대로 남산 중앙정보부로 이송해갔고 높은 사람 앞에 세우고 소개한 다음 그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는데로 오른쪽으로 따라 내려가 지하 작은 방에 들어가 수사관과 고된 이틀을 지났다. 22일 조서를 쓰고 저녁 11시경에 풀려나 세종호텔 앞에서 버스로 서울역에 와서 밤기차로 귀가했다.
3월 10일 아침에 갑자기 검정색 옷차림의 압송으로 세단차를 타고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남산 중정으로 가서 지하에 내려가 아무런 수사 없이 열손가락 피아노 도장을 찍고 검찰청으로 정신없이 이송되어 젊은 검사 앞에서 조서의 사실을 확인하는데 본의가 아님을 강력히 주장하니 웃으면서 그러면 다시 남산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왈가왈부 시비하다 밤 10시 넘어 차를 타고 서대문 서울구치소 9사상 1호에 죄수복을 갈아입고 수감될 때는 밤 11시가 되었다. 독방에서 불안과 추위와 철저한 감시에 3월 15일엔 드디어 신문에 대문짝만한 대서특필 관계로 다시 23호실로 이감하여 8개월을 지냈다.
서울 구치소는 긴급조치에 걸려 들어온 죄수로 초만원을 이뤘다. 11월 11일 출감할 때까지 몇 가지 기억나는 것을 발췌해 본다.
1. 김동길 교수와 대화
“여보세요, 거기 누구시오?” 감방 벽을 두드리며 “통방”을 시작했다 대답이 없자 나는 일어서서 9사상 22호 옆방 벽을 크게 두드리며 23호와 두 방을 비추는 천장 밑의 전구 구멍을 향해 큰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대답이 왔다. “예, 저는 김동길이요!” “김동길은 뭣 하는 사람이요?” “연세대학교 교수요. 댁은 뉘시오?”
“예, 저는 목사요. 이름은 한명국이고, 부산에서 왔소” 이렇게 두 사람은 구두 인사를 나눴다. 담당 교도관이 퇴근하고 야간 교도관으로 교체된 뒤 식사시간이 끝나면 “마포종점”이란 노래가 들려오고, 그때가 통방하기 쉬운 시간이다. 나는 다시 크게 “우리 다시 통방 좀 합시다. 궁금한 것 좀 알고 지냅시다”라고 말을 텄다. 그는 “예, 그럽시다”하고 대답했다. “김 교수께서는 무슨 죄목으로 들어왔소?” “긴급조치 하에 ‘국가 전복 반란 음모죄’로 들어왔소, 목사님은 무슨 죄로 들어왔소?” “저는 보안법 위반으로 들어온 것이요.”
나는 다시 “김교수는 기소장이 몇 장이나 되시오?” 라고 물었다. “저는 무려 60장이나 되오” “여보, 교수가 가르치라는 글은 안 가르치고 학생들에게 무슨 못된 큰 죄를 지었길래 기소장이 60장이나 된단 말이오?”
“여보시오, 댁은 목사라고 했는데, 그 죄질에 기소장은 얼마나 되오?”
“저는 불과 여섯 줄이라오”
잠시 후, 옆 방에서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사실, 나는 그렇게 못된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요. 내 강의를 들은 학생들에게 취조한 얘기를 모두 모아 남산에서 만들어 놓은 것이오!”
“저도 사실은 우리 아버지가 수사관의 위압으로 하신 말 속에 ‘들’이란 글자 한자 때문에 들어왔소!”
처음에는 김 교수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통방도 하고 가까이 했으나 알고 보니 그는 김옥길 총장의 동생으로 훌륭한 크리스천 교수였다. 고등법원 재판이 끝나 안양교도소로 갈 때까지 4개월간 좋은 감방 친구로 기억된다.
김 교수는 같이 들어온 200여명의 대학생들을 생각해서 김옥길 총장이 넣어 주려는 사식을 거절하는 아량과 사랑을 가진 큰 사람이었다. 후에 알고 보니 김 교수는 2년을, 그리고 나는 8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2. 옥중에서 전도한 세 사람
대학생 시절에 가까이 계셨던 초대 산은 총재 배민수 박사님 댁에 자주 들러 말씀을 들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는데, 일반대학, 군대 대학, 형무소 대학, 이상 3개 대학 중에 제일 힘든 형무소 대학은 지나고 보면, 인생살이에 매우 유익이 많다고 하신 말씀의 뜻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때 교도관의 호출로 안내를 따라 출정했다. 접견 대기실에서 시간이 조금 걸렸는데, 나는 함께 기다리는 세 사람에게 짧은 시간이나마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가졌다. 먼저 대기 중인 셋은 대화가 무르익어 있었다.
첫째, 전씨는 6.25전쟁에 종군하여 인민군 포로로 북송 중 하얼빈까지 도망쳐서 연명하고 남하 하여 조국의 품에 돌아왔다고 했다. 그는 1974년 3월 긴급조치 하에 간첩단 사건으로 중정을 거쳐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출정 때나 운동시간에 만날때마다 복음을 전하였다.
또 1심 후에는 가끔 내게 넣어주는 소고기 사식을 먹지 않고 “소지”(교도소 안에 심부름과 청소를 하는 소년범)를 시켜 그에게 넣어주기도 했다. 그는 이런 친절 때문에 복음을 받고 예수님을 믿기로 했다.
둘째, 또 한 사람은 박 씨였다. 그는 그동안 자기들끼리 장황하게 늘어 놓은 전 씨의 말을 듣고 “아무렴, 이왕 할 판이면 크게 해 먹어야지!”라고 말하면서 맞장구를 쳤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1974년 당시 73억 은행 돈을 꿀꺽 삼킨 그 은행장의 횡령사건은 서울 은행가의 지축을 흔든 대사건이었다.
인물도 좋고 인상이 좋아 훌륭한 사람으로 보았으나 그의 마음은 황금의 노예로 전락하여 나의 전도를 잠깐 듣더니 아랑곳하지 않고 전씨에게 말머리를 바꾸었다. 나중에 들으니, 출감하여 밍크 옷 수출입 장사를 하다가 방안에서 가룟 유다처럼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 들었다.
셋째, 나는 옆에 앉은 눈망울이 또렷한 한복 차림의 죄수와 인사를 나누고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김씨라는 그 사람은 나를 노려보며 차분히 달려들었다. 그는 일본 동경대학교 교수였는데, 서울대학교에 교환 교수로 와서 공산주의 선전 강의를 하다가 반공법, 보안법에 걸려 1심에서 15년, 고법에서 12년 선고를 받고 대법에서 상고 중이라고 했다.
“목사님, 나는 공산주의자로 칼 막스와 엥겔스의 사상을 따라 사는데, 당신은 당신이 신봉하는 예수님과 같이 살고 있소?”라고 되물었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그 말은 나의 폐부를 찔러 일침을 가하는 말이었다.
“김선생, 선생께서 공산주의 사상대로 살고 계시다니 그것이 어떤 삶인지는 모르겠으나, 왜 상소를 해 감형을 받으려고 합니까? 떳떳하게 15년을 사시지!”라고 대꾸를 했다.
“사실 나는 목사가 되었지만 예수님처럼 살려고 힘쓰나 그렇게는 못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통해 바울 사도와 열두 제자 및 성 프란시스, 성 다미엔, 인도의 선다 싱이나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꼬(하천풍언), 그리고 한국의 손양원, 주기철 목사와 같은 분들이나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수천 수만의 성도들이 있소. 김선생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십시오!”
접견시간이 다 되어 헤어지고 그 후 다시 만나지 못해 천국에서도 못 만날 것 같다.
한명국 목사
BWA전 부총재
예사랑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