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마태는 헤롯왕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인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여야 하듯이, 그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이방인 수용을 인식하기 원한 것이다.
헤롯왕은 동방 박사들이 고국으로 돌아간 사실을 알고 예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애굽으로 피한 예수를 찾지 못한다. 결국 헬롯왕은 베들레헴과 그 지경에 있는 두 살 이하 아이들을 살해함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지만 예수를 죽이는 일은 실패하고 만다(마 2:16).
유대인을 대표하는 헤롯왕은 확실히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 것이다. 반면에 동방 박사의 경배 서사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를 메시아로 인식한 것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동방 박사이다. 동방 박사와 베들레헴 지역은 예수 탄생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동방 박사의 경배 서사는 마태의 신학적 관점인 이방인 수용의 당위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방 박사는 예물을 준비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지도자인 헤롯에게 경배하지 않고 메시아 예수를 찾아와서 직접 경배했다.
더욱이, 동방 박사가 예물을 드리는 모습은 이방인들이 금과 유향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여호와를 찬양하는 이사야서의 기록을 연상시킨다(사 60:6). 이사야 선지자가 묘사한 이 구절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회복과 심판의 목적은 모든 열방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경배하는 것이다(참조, 사 2:1~4).
마태가 위에서 언급한 이사야의 전승을 신학적 관점에서 동방 박사 서사에 결부시켰음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단지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조차 인식하지 못한 메시아 현현을 이방인이 인식했다는 차원을 넘어 이방인도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속 목적에 포함됐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동방 박사 서사를 통해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이며 종말론적 마태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어야 함을 제시한 것이다.
둘째, 동방 박사가 방문한 지역은 베들레헴이고 예수가 자란 곳은 나사렛이다(마 2:1, 5). 유대 전통과 역사의 중심인 예루살렘에 비하면 베들레헴과 나사렛은 중요하지 않은 슬픔의 도시이다(마 2:16). 베들레헴은 권력을 가진 예루살렘에 비해 형편없이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예수의 부모는 박해를 피해 나사렛에서 살아야만 했다(마 2:23). 종교의 중심 도시인 예루살렘은 예수를 거부했다. 그리고 예수 탄생 자체를 부정적으로 봤다. 하지만 베들레헴은 이방인 동방 박사의 방문을 수용했고, 그들의 예수 경배를 허용했다.
이것은 유대교를 대표하는 거대 도시 예루살렘은 예수를 거부했지만 이름 없는 작은 도시 베들레헴은 예수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마태공동체는 유대교를 대표하는 예루살렘 입장에서 이방인 수용을 거부하지 말고 베들레헴이 동방 박사를 수용한 것처럼 이방인을 수용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제기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마태복음 1장에 드러난 예수 족보 서사 플롯의 이방인 수용 의도는 간접적이었다. 예수의 족보에 예수를 아브라함의 자손과 이방인 여인을 언급한 것은 구약 성경이 이미 이방인을 유대공동체 구성원으로 수용했다는 측면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구성됐다. 구약 성서가 이방인을 유대인 공동체 구성원으로 수용했다는 것은 마태공동체도 이방인을 공동체 회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타당성을 제기하기 위한 신학적 의도일 것이다.
즉 마태공동체가 이방인을 선교 대상으로 바라보아야 함을 구약의 아브라함 자손과 이방인 여인 인용을 통해 간접적으로 제안한 것이다. 반면에 동방 박사의 예수 경배 서사는 이방인을 마태공동체 구성원으로 수용하려는 선교 전략을 보다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태복음 1장과 다르게 동방 박사는 직접 예수를 경배하기 방문함으로 이방인 수용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짐을 함의한다.
예수를 반대하는 헤롯왕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서 있었고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한 동방 박사는 그들의 반대편에 서 있다. 이러한 대조는 유대교의 이방인 수용의 반대에 맞서 마태공동체는 이방인을 수용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환언하면, 마태복음 2:1~18 서사는 1장에서 제시한 예수가 이방인을 구원할 메시아라는 개념을 간접적으로 제시한 것에 대한 연장선상에서 현재 마태공동체가 이방인을 수용해야함을 직접적으로 플롯에 반영하여 전개한 것이다. 그러면 동방박사의 직접적인 방문으로 이루어진 경배는 어떠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IV. 동방박사의 경배 유형에 내포된 이방인 수용 의도
마태복음에 묘사된 경배를 나타내는 단어들은 마태공동체의 내부 상황과 결부되어 신학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것으로 추론된다. 따라서 마태복음에 언급된 경배의 유형을 분석함으로, 그곳에 함축된 신학적 의미를 찾아 확인하는 동시에 동방 박사의 경배에 내포된 이방인 수용의 신학적 의도를 확인할 것이다.
1. 탄원 경배
마태복음 서사에서 탄원(supplication)을 위한 경배를 위해 개인적으로 예수를 찾아온 자들은 나병환자(8:2), 한 관리(9:18), 가나안 여인(15:25), 세베데 아들의 어머니(20:20) 이다. 탄원을 요구한 개인들은 “예수에게 나오고”, “경배하고”, “필요한 것을 간구”하는 형태의 순서를 따랐다.
이들의 탄원 경배는 경배 대상자를 향한 “의존”과 “신뢰”로 정의할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을 경배 대상으로 생각한 개인 탄원자들이 그를 의존하려는 마음으로 찾아 왔지만, 그들의 필요를 묻지는 않았다. 더욱이 마태복음 서사에 묘사된 탄원자들은 문제 해결을 받은 후에도 경배 대상인 예수를 향하여 전혀 감사를 표현하지 않았다.
탄원자가 무슨 이유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문제 해결을 받은 후 감사를 표현해야 할 의무도 없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마태복음의 이러한 묘사는 고침을 받은 후 즉각적으로 경배를 표현한 다른 복음서의 탄원자들의 모습과 상당히 대조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참조, 눅 17:11~18).
따라서 마태복음 서사에 묘사된 필요를 요청한 탄원자들은 예수에게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았고, 치유의 승인을 요청했다는 묘사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의 예수 경배 사건은 자신의 믿음을 보이며 필요를 요청하는 탄원자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마 15:21~28).
딸을 위한 어머니의 간절한 간구는 믿음을 승인 받기 위한 모습으로 보이는데, 그녀는 예수가 자신의 딸을 고칠 수 있는 능력과 승인할 위치에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가나안 여인의 경배는, 경배 대상을 향한 의존과 신뢰가 함께 나타난 것이다.
마태복음에 묘사된 이러한 탄원자들의 경배 자세는 그들 공동체가 특별한 신앙 개념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마태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신앙적 확신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32).
마태복음 서사에 묘사된 개인 탄원자들의 경배 모습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필요를 간구하기 전부터 이미 예수가 신적인 능력을 가진 자라는 전제를 담고 있다. 그럼으로 그들은 특별한 탄원의 전략 없이 경배자로서 자신들의 필요를 요구한 것이다.
탄원의 경배는 경배 하는 자들이 감사와 희생을 행하지 않고도 필요를 요구한 것으로 보아 마태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예수의 신적 정체성과 경배 하는 자의 믿음의 필요성을 공동체 구성원에게 교육하기 위한 차원에서 제시하려는 신학적 의도가 함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 화답 경배
마태복음 서사에는 화답(responsive)을 표현하는 경배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개인과 단체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은혜를 허락한 경배 대상에게 화답하는 형태의 경배다. 예수가 한 중풍 병자를 고치는 사건을 목격한 무리들이 하나님을 향한 찬양(doxa,zw)의 경배를 드린다(마 9:8).
다른 한 사건은 예수가 산에 올라가 무리들을 치유한 후 하나님께 영광(doxa,zw)을 돌리는 경배다(마 15:31). 이러한 경배 유형의 특징은 권세 인식(acknowledge)과 축하(celebration)의 두 요소가 함께 어우러진 경배 대상자를 향한 화답을 나타내는 경배이다.
화답의 경배 유형에서 경배 자들이 인식한 것은 하나님이 치유 사역의 책임을 예수에게 돌렸다는 것이다. 즉 예수가 중풍 병자를 치유함으로 하나님의 권세를 위임 받았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군중들은 예수가 소유한 권세에 대해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러한 권세를 인자에게 주었음을 찬양했다(마 9:6).
더욱이 예수가 많은 사람들을 치유한 사건에서도 무리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마 15:31). 마태는 예수의 치유 사역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제시하는 동시에 하나님은 현재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
화답 경배의 또 다른 요소는 축하를 경배 대상에게 돌리는 것이다. 예수는 아버지께 기도하기를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났다고 했다. 이것은 위 두 구절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축하하는 찬양(doxa,zw)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기적을 경험한 무리들은 하나님이 하신 선한 일에 감사하지만, 하나님이 예수에게 특별한 능력을 줬다는 사실을 깨닫지는 못했다. 화답의 경배는 자신들의 주변에 일어난 기적 사건에 대해 예수의 권세 인식과 축하가 담겨있음을 확인했다.
화답의 경배에는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치유 사역을 직접 행하는 이는 예수지만, 예수의 사역으로 인해 치유와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인식한 능력에 대한 감사는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가진 신적 능력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음을 드러내려는 마태복음 저자의 신학적 목적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인철 교수
침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