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부활의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마지막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했다”와 “내가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고 있다”는 말씀은 예수의 올리우심에 관한 요한의 독특한 신학을 반영한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신학의 출발점과 중심점으로 삼았던 사도 바울은 부활과 올리우심을 구분하지 않았다. 예수의 부활은 곧 하나님의 영광에로의 올리우심이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서 2:9에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관한 언급 후에 바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활은 곧 그의 올리우심이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인들 사이에 부활 신학이 발전함에 따라, 부활과 올리우심(승귀 혹은 승천)을 구분하는 경향이 새로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누가는 그런 신학의 대변자였다. 누가에 따르면, 부활의 예수는 승천하기 전 사십 일 동안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활동한 후에(행 1:3), 그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한 것으로 제시된다(행 1:9; cf. 눅 24:51).
요한은 이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부활과 승천을 구분한 누가의 신학을 존중하면서도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발전되고 독특한 삼위일체 신학을 반영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올리우심을 단번에 이루어진 사건으로 보지 않고 십자가에 들림으로부터 시작한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한다. 십자가, 부활, 올리우심, 그리고 하늘 영광에의 복귀 모두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하나의 사건에 포함된 요소들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들림을 받았을 때, 그의 올리우심은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는 이제 아버지께로 완전하게 올라가야 한다. “아직 올라가지 못했다”는 동사가 완료시제인 것은 아직 올라감이 완성된 상태에 이르지 못한 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요한이 마리아가 예수를 만나던 시점을 마치 누가의 언급에서 승천 전에 사십 일 동안 그의 제자들 가운데서 활동하신 기간의 하나로 이해한 것을 보여준다. 예수의 ‘올리우심’의 이러한 진행적 이해는 다음에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올라가고 있다”라는 동사의 현재시제를 통해서도 표현된다.
따라서, 요한에 따르면, 부활의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현현했을 때는 아들의 올리우심이 완성되고 아버지와 아들이 완전하게 연합된 존재로서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로서 제자들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신 것이 된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현현하신 예수는, 아버지께로 이미 올라가신 분으로서, 그가 전에 약속하신 대로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주신다(20:22).
요한복음서에서 보혜사 성령은 누가가 말하는 성령과 성격을 달리한다. 제자들에게 오시는 보혜사 성령은 부활의 예수 자신이며, 또 아버지와 아들이 연합된 ‘우리’로서의 하나님이시다(14:16~17, 19, 23). 요한에게 있어서, 성령은 철저히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속에서 활동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의 현현이 승천하기 전에 이루어졌으며 승천 후에 성령이 임했다고 본 누가의 견해와 성격을 달리하는 요한의 삼위일체 신학을 반영한다. 마리아는 예수의 제자들에게 가서 부활의 소식을 전하기 전에 예수의 부활에 담긴 이 진리를 먼저 알아야 했다.
모든 부활현현 이야기들에 위임의 말씀이 포함된 것과 같이, 예수는 마리아에게 “가서 이것(예수의 올리우심)을 말하라”고 위임한다. 그런데 예수는 그녀에게 “내 형제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제자들에게’ 갔다고 나온다(20:18). 예수의 말씀에서 “내 형제들”은 “그의 제자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요한복음에서 지금까지 ‘형제들’과 ‘제자들’은 서로 구별되는 집단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예수의 친형제들도 이 용어로 불리어졌지만(2:12; 7:3, 5, 10),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로 제시되었다(7:5). 그런데 누가는 예수의 승천 이후 초기부터 신자들의 공동체 속에 예수의 형제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을 전달한다(행 1:14).
그런 점에서 예수의 말씀은 믿지 않는 그의 친형제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에서 이 때는 아직 그의 제자들에게조차 부활의 소식이 전달되지 않은 최초의 시점이기 때문에, 이 때에 믿지 않는 그의 친형제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고 했다는 것은 상황과 잘 맞지 않는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제자들의 정체성은 예수가 하나님을 가리켜 사용한 칭호들에서도 표현된다. 예수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으로 부른다. 이것은 아버지께로 올라가신 예수 안에서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또 예수의 제자들의 공동체는 아버지와 그 아들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가족관계인 것을 표현한다.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관계는 하나님과 그의 제자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오직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 예수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며 그래서 그를 믿는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1:12).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께로 나가는 유일한 길이 되신다(14:6). 예수가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가 된 것과 같이 그의 제자들도 그 일을 계승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들이 된다. 여기서 또 주목해야 할 점은 이렇게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예수의 존재의 본질과 그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에 관한 진리를 제자들에게 전하라는 위임이 여성인 마리아에게 맡겨진 사실이다.
당시 유대교 사회에서 여자들은 증인이 될 수 없는 차별을 받았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에서는 여자들도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진리(복음)를 전파할 수 있는 자격과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저자는 막달라 마리아가 이 전파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했는가를 제시한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20:18). ‘이르니라’로 번역된 동사는 위임받은 것을 전달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녀는 부활의 예수를 직접적으로 대면한 것과 그가 그녀에게 말씀한 것들을 제자들에게 전달했다.
이것은 그녀가 부활의 예수를 만나기 전에 두 제자에게 사람들이 예수를 무덤에서 가져갔다고 단순히 말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진 그녀의 변화를 가리킨다. 그녀는 부활의 복음을 위임받아 전하는 ‘전갈자’이며 “보냄을 받은 자”(사도)가 된 것이다. 그녀가 예수를 부르는 칭호가 ‘선생님’에서 ‘주’로 변경되었다. 마리아는 처음에 두 제자에게 말할 때에도 주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20:2), 그 때에 그것은 부활 신앙의 의미가 없는 단순한 존칭어에 불과했다.
그러나 여기서 주는 부활 신앙에 기초하여 예수의 유일한 존재성을 포함하는 기독론적 칭호이다. ‘주’라는 칭호는 본래 헬라어 구약성서인 70인경에서 ‘여호와’의 대용어로 사용되었다.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부활의 예수를 주로 부르게 되었는데, 예수를 주로 부르는 것은 예수의 존재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최고의 기독론적 칭호였다.
이 칭호는 주로 헬라계 유대인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사용되었으며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선호한 칭호도 “주 예수” 혹은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주라는 칭호를 기독론적으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다가 예수의 부활과 함께 사용한다. 그래서 부활의 예수를 대면한 도마는 그를 향하여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주 하나님”은 요한공동체에서도 최고의 기독론적 칭호가 되었다.
“내가 주를 보았다”는 말은 부활현현의 경험에 대한 신앙고백적 표현이다. 부활의 예수는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육신의 존재가 아니며 이제 하나님의 존재로 변형된 분이다. 그래서 그 분의 존재는 ‘영’이라고 부르는 비가시적이며 비물질적인 “초월적 실재”가 되신다(4:24). 그런 영의 존재를 본다는 것은 육안으로 어떤 실체의 형상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초월적 실재를 만나는 계시의 경험에 대한 시각적인 표현이다. “주께서 자기에게 이것들을 말씀하셨다”라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에 대한 청각적 표현이다. 여기서 “내가 보았다”라는 동사는 부활의 주님을 보는 신비한 체험을 나타내며 또 이 동사의 시제가 완료인 것은 그 체험의 현재적 결과를 표현한다. 이런 완료의 의미를 고려하여 마리아의 말을 해석하면, “내가 주님을 보았으며 그 결과로 지금도 보고 있다”라는 말이 된다.
이것은 “또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리라”(16:16, 17, 19)는 말씀의 성취이기도 하다. 부활의 주님을 향하여 눈이 열릴 때, 우리는 그 주님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동사는 바울이 그의 다메섹 체험을 말할 때에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내게도 보이셨다”(고전 15:8); “내가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고전 9:1).
최초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사도직을 결정하는 제일 조건은 부활현현의 체험이었다. 그래서 바울도 그런 체험에 기초하여 그의 사도직을 주장했다(고전 15:8). 그런 점에서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현현을 최초로 경험했으며 그 주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달한 최초의 사도이며 사도 중의 사도와 같은 인물이 되었다.
김광수 교수
침신대 신학과(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