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잊을 때가 벌써 지났다. 율법과 맞붙어 사랑해 보려했지만 율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 문제란 무엇인가? 인간이 율법을 실천하기에는 역부족이요 무능한 존재자란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에 율법과 시원섭섭한 이별을 고해야만 했다. “잊으리” 율법을 말이다.
나는 남국인 작곡 이승연 노래로 유행했던 유행가 “잊으리”에 그 “님”을 율법으로 대치시켜 율법과의 이별을 가끔 노래 부른다. 겉은 유행가이고 속은 복음성가이라니까.
「그토록 사랑한 그님(율법)을 보내고, 어이해 나 홀로 외로워 하는가 생각하면 무얼해 만날 수 없는 님(율법). 차라리 손 모아 행복을 빌리라. 이제는 모두 잊으리 그대(율법)와 나의 순간들. 이제는 모두 잊으리 그날의 행복 꿈이라고. 생각하면 무얼해 만날 수 없는 님(율법) 차라리 손 모아 행복을 빌리라.」
과거에 우리는 율법을 그토록 사랑했다. 왜냐하면 일단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요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라고 하신 율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율법에는 하자가 없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얼마나 훌륭한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살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갈보리 십자가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으니 그게 복음 아닌가?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님 즉 율법을 떠나 보내야한다. 과거의 미운 정 고운 정 때문에 허전(?)할지 모른다. 나 홀로 외로워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생각하면 무얼하겠나? 만날 수 없는 율법이다. 만날 수 없는 율법을 왜 만나려 하는가?
예수께서 우리와 율법 사이를 갈라 놓으셨는데 왜 우리는 또 붙으려고 하는가? 그래서 차라리 손 모아 “율법, 그만 잘 가세요“하고 행복을 빌어 주는 거다. 율법은 못됐거나 못된 짓을 한 게 아니라 내가 못되었고 못된 짓을 했을 뿐이니, 우리의 고백은 ”손 모아 행복을 빌리라“ 뿐이 아닐까?
이제는 모두 잊으리. 율법과 관계된 모든 과거지사를 순간적이며 그날의 행복 꿈이라고 여겨 미련 없이 떠나 보내야할 율법인 것이다. 생각하면 무얼해 만날 수 없는 율법. 이게 정말 아쉬우면서도 지극히 행복한 일이다. 만나봐야 또 실망, 긴장, 불안밖에 더 있겠는가? 그래서 차라리 손 모아 율법에게 행복을 빌어주는 거다.
“율법. 고맙소, 나를 잘 밝혀 줘서요.” 그래서 율법을 떠나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와서 이런 행복을 누리는 거지. 그게 로마서 7장의 새남편 얻은 새아내의 기쁨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잊으리” 그 님을 보내고, 외로울지 모르나 다시 만날 수 없는 그 님에게 행복이나 빌어 주려므마.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의 요약이 아닌가? 그러나 두 번 다시 율법을 맞을 생각은 말자구나.
水流(수류) 권혁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