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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설교학 이후에 나타난 현대설교의 동향과 과제-5

신설교학 이후에 나타난 현대설교의 동향과 과제-5

(A Study of the Trends and the Tasks of Contemporary Preaching After the New Homiletics )

2. 논증방식의 문제

신설교학이 안고 있는 다른 하나의 문제는 귀납적 전달 방식을 필요 이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설교가 청중에게 보다 더 잘 전달되기 위한 목적으로 신설교학이 필요하였다면, 굳이 그 전개 방식을 전통설교와의 대비 방식을 통해서 과거의 설교 방식은 전적으로 연역적(명제적) 방식이었다고 규명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전통 설교에서도 논증 방식을 연역적 방식과 귀납적 방식을 동시에 주요 방법론으로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성서적 개념을 정확하게 싫어 나르기 위한 목적을 가지는 강해설교의 경우 하나의 주어진 본문의 문학적, 역사적, 그리고 상황적 해석의 결과를 조직화하여 청중에게 전달할 때, 그 논증 방식은 반드시 연역적이지 않다. 얼마든지 청중으로 하여금 설교의 무대에 적극 참여하도록 귀납적 논증 형태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에서 귀납적 논증 방식이 가지는 여러 가지 장점이 인정된다. 그렇다면 모든 설교를 귀납적으로 하는 것이 최선의 길인가? 그것도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다양성을 추구하는 현대 청중을 또다시 식상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를테면, 매주 강단에서 이야기 설교가 증거되면 청중은 모든 면에서 만족함을 보일 것인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다양성을 추구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설교학계에서도 그동안 새로운 설교 방법론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전개되었고, 아울러 이야기 설교에 대한 많은 강조가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한국교회 강단에서 증거되는 설교는 이야기설교와는 무관한 듯이 보인다. 이에 대하여 최진봉은, “그러나 이제 새로운 설교학은 그 이론들을 배태시킨 신학적 담론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설교자들의 책상머리에서 멀어져가는 듯하다고 평가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신설교학을 태동시켰던 북미주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여전히 이야기설교를 비롯하여 신설교학에 대한 목소리는 있지만, 최근 북미에서 출판되는 설교학 출판물 가운데는 오히려 성경 본문에 충실한 설교,” “강해설교,” 나아가 본문이 이끄는 설교에 관한 것들이 주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신설교학은 또한 이야기 설교가 마치 신설교학의 산물인 것처럼 논리를 펼치지만, 신설교학 이전에도 이야기 설교는 이미 시행되었고 부분적으로 설교학계에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하나의 설교 전달법으로서의 이야기 설교는 나름대로 많은 장점을 가지지만 신설교학의 가치를 이야기설교에서 지나치게 구하는 것은 자칫하면 억지 주장이 될 수도 있다. 오히려 신설교학의 현대설교에 대한 긍정적인 영향이 있다면, 그것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정서에 부응하여 설교전달 방법을 다양하게 시도하게 하는 동력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3. 청중 참여와 설교 결론의 문제

신설교학의 심각한 문제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설교의 결론을 회중에게 맡긴다는 것이다. 소위 결론의 개방성 문제이다. 전통설교에 비하여 신설교학적 설교는 청중의 경험과 참여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의미있는 제안이다. 대체로 연역적 논증 방식은 설교자의 주관적인 성경해석과 설교 명제에 입각한 논리 전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청중의 참여라는 측면에서 취약성을 가진다. 따라서 이와 같은 문제를 해소시키기 위한 일환으로서 귀납법적 제안은 매우 건설적으로 평가된다. 크레독은 메시지에 입각한 청중의 삶의 적용과 연관하여 설교의 결론을 청중에게 일임해야 할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설교가 제대로 된다면 청중의 삶으로 결론적인 적용을 할 필요가 없다.

청중이 여행을 한다면 결론도 그들의 몫이다. 자신의 적절한 상황에 대한 의미는 명확할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피해갈 수도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란 특별한 목회자가 하는 촉구에 달려있지 않고 듣는 사람들에게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자발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힘에 달려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귀납적으로 진행되는 설교는 촉구보다는 묘사적이며 명령하는 것보다 수긍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설교에 있어 청중의 경험과 지나친 참여(역할)의 문제가 언제나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크레독이나 로우리가 설교에서 본문 의미의 최종 단계는 저자나 성경 본문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 청중에 있다고 하는 주장은 성서적 설교 관점에서 본다면 위험스러운 발상이다. 심지어 로우리는 설교의 목적은 진리를 전달하는 데 있지 않고 청중의 경험을 창출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본문 해석의 축이 저자와 본문에서 청중으로 옮겨진 결과이다. 이것은 다분히 독자반응 비평적인 발상으로서 자칫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간 곳 없어지고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체험적 영역에 머물게 될 위험성을 가진다. 최근의 신설교학을 평가하면서 켐벨은 체험에 대한 강조가 결국 하나님을 지나치게 즉각적인 인간의 체험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신학적상대주의를 야기 시킨다고 지적한다. 설교자가 설교의 결론을 내리는 대신 그 몫을 회중에게 넘기는 열려진 결론방식은 청중 각자의 입장에서 설교의 결론을 자기중심적으로 내린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는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종결 처리는 설교가 명확한 본문 해석의 근거를 바탕으로 하여 통일된 실천적 적용을 제시하는 고전적 설교의 개념과 전적으로 상치된다.

 

4. 성경과 설교자의 권위 문제

설교자의 권위를 내려놓고 설교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청중의 경험에 맡기라는 신설교학의 주장에 대하여 성서적 설교를 추구하는 복음주의적 입장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와 이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은 전령자로서 설교자의 권위를 내려놓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설교의 본질에 관한 것으로서 다분히 신학적인 사안이다. 신약성서가 밝히는 설교자의 정체성은 용어 “kerux”에서 확인된다. 곧 말씀의 전령자로서 “kerux”의 사명은 권위자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는 하나님의 전령자로서의 권위를 가진다. 그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 예수께서도 말씀을 전하도록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 보내시면서 말씀의 권세뿐만 아니라 설교자들의 권세까지 덧입혀 주셨다(6:7~13; 10:1~15). 바울은 말씀 증거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kerux”라고 밝혔다(딤후 1:11). 부름 받은 전령자로서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성서의 말씀을 정확하게 밝혀 가감없이 증거하는 사명을 가진다. 제임스 톰슨(James Thompson)은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는 권위없이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는 설교는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류응렬은 성경을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기독교 설교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설교자는 설교할 이유가 없고 성경에 의존할 필요도 없다고 규명하면서 설교의 권위는 설교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했다. 성경의 권위가 보장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워질 수 없고 기독교의 설교는 한낮 지성에 호소하는 교훈이나 사상으로 전락할 것이다.

문상기 교수

침신대 신학과(실천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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