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을 중심으로―
그러나 동아기독교는 교단적인 차원의 대응에서 일심단결로 순교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일본기독교단 통리자 도미타 미쓰루는 “대동아공영권에 있는 크리스천에게 보내는 서한”을 통해 천황제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고, 국세가 세계열강들과 어깨를 같이 하게 됨으로 대동아전쟁이라 하여, 중국과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싸우매, 각 전선에서 전전 승승하니 기세가 높아져서 조선 사람들에게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가가호호에 천조대신의 신패를 배부하여 섬기게 되었고,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비국민이라 하여 비난하였다.
교회에서는 예배 전에 국민의례를 먼저하고 예배를 드리게 하였는데 이때 김영관 감목은 신사참배 문제는 논의의 대상도 되지 않으려니와, 동방요배도, 신자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달 편지로서, 전국 교인들을 지도하게 되었다. 이것이 1939년에 발각되어 김영관, 전치규, 이종덕, 백남조 네 목사가 경찰에 구속되어 6개월 간 원산에서 고생하였다.
1940년 이종근 목사가 감목을 맡게 되고, 우태호와 동아기독교 지도자들과의 불화 속에서 일본 원산경찰과 원산헌병대가 개입하게 됨으로 1941년 교단의 책임자인 이종근, 김영관, 노재천, 전치규 네 목사가 1941년 7월에 구속되고, 이어 성경과 복음찬미를 인쇄한 것을 총독부 출판과에서 모조리 압수하여 갔다.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인데, 천년왕국설을 설교한 것과 동방요배, 신사참배 거부 문제 등이었다. 이종근 감목을 구속하여 심문한 6개의 내용은 질문1. 예수 재림시는 그 지위가 어떠한가? 답. 만왕의 왕으로 왕국을 건설하고 등국하신다.
질문2. 천년왕국이 건설되면 일본도 그 통치하에 들어가는가? 답. 그렇다.
질문3. 천황폐하도 불신 시는 멸망 받는가? 답. 성경에 그렇게 명기되어 있다.
질문4. 그때는 일본도 망하고 천황도 예수 통치하에 굴복하게 되는가?
답. 전 세계가 통일되는 동시에 예수님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다.
질문5. 국체명징에 위반이면 불경죄에 범하는 것을 모르는가?
답. 신앙양심에서 답하는 바다.
질문6. 단체 대표인 감목이 그렇게 답변할 때는 간부는 물론이고, 전교단의 지도자들은 동일한 신조로 지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답. 동열한 성경으로 동일한 신앙을 소유하는 것이 합치되는 이론일 것이다.
다음 날, 즉 1942년 6월 11일. 동아기독교 지도자 32인이 순차적으로 원산헌병대 유치장에 구금되어 혹독한 고문과 끝없는 옥중 생활이었다. 32인의 영어생활이 계속되는 가운데 교단 해체령이 함흥재판소 법정에서 1944년 5월 10일부로 내렸다.
각 지방 관헌들의 핍박으로 집회금지는 물론이고, 우선 교회 종들은 강제로 헌납시키고, 예배당은 매각처분하여 그 대금을 국방헌금에 납입시켰다.
전치규 목사는 1916년에 임직되어 원산지방과 충청도 서쪽지방에서 전도에 활동하고 1923년에 감목에 임명되어 침례교회를 통할하게 되었으며 선교사 펜윅으로 더불어 성경번역에 착수하여 교회에 공을 세웠으며, 신약전서를 털붓으로 일곱 번이나 쓴 경건 생활을 하였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소위 대동아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조선총독부의 조선 인민에 대한 탄압은 그 극도에 이를 때이다. 이 때 전목사는 원산에 있는 침례교총본부에서 성경과 찬송가 등 서적출판의 사무를 관장하고 있던 때이다.
이 때 그들은 침례교파 탄압에 손을 뻗치기 시작하여 그 총본부에 있는 성서 6천여권, 찬미책 5백여권을 압수하여 갔고, 전국에 있는 침례파 목사와 장로 32인을 구금하여 원산감옥에 집어넣으니 그 죄목이라는 것은 1. 예수를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믿는 것. 2. 천년왕국시대에 일본도 그 밑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 3. 천황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것. 4. 이상과 같은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교리는 일본국체의 근본이념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이 때 검속된 이들은 다수가 기소유예로 석방되고 나머지 9인 중에서도 전치규 목사만은 3년 간이나 함흥감옥에서 옥살이로 혹심한 고문을 당한데다가 먹지 못하여 피가 마르고, 피골이 상접하여 출옥하지 못하고 주려죽으니 그때가 1944년 2월 13일이었다. 죽은 지 며칠 후에 시체를 인계하여 원산에 있는 그의 집에서 교회장으로 마지막을 보내고 유해는 원산 묘지에 안장하였다.
일제는 1931년 만주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뒤이어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장기간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일제가 느낀 것은 한국교회야말로 이러한 침략 정책수행에 일대 암적 존재라는 것이었다. 1942년 3월에는 한국교회로 하여금 일본기독교 조선혁신교단을 조직케 하였다. 모세오경과 요한계시록은 민족사상 또는 내세 사상이 강하게 표현되었다는 이유로 삭제하였으며, 찬송가도 여러 장을 삭제하였다. 이것도 일본말 성경을 읽고 일본말 설교를 하고 찬송가도 모두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였다. 성직자는 강대에 올라설 때마다 까운이 아닌 일본식 전투복을 입도록 했으며 일본 국기에 대한 배례, 궁성 요배, 출정 장병을 위한 무운 장구의 기원과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 등이 반드시 시행 되어야 했었다. 1943년 9월부터는 주일 저녁예배와 삼일기도회가 폐지되었다.
교단적인 대 탄압과 교단 지도자들의 무더기 옥사 사건의 충격이 진정되기도 전에 또 하나의 사건이 전국 동아기독교인을 경악케 하였다. 1944년 5월 10일 함흥재판소에서는 놀랍게도 동아기독교의 교단해체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당시 일본은 한국 내 서울에 그들의 최고 법정인 고등법원을 설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방법원에서 판결하여 해체령을 내린다는 것은 법질서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이 불법적인 교단 해체령으로 동아기독교는 원산의 총부뿐 아니라 전국 교회에 예배 및 집회가 금지되었고, 교회 건물은 폐쇄되었고, 교회 재산은 물론 종각까지 국방헌금의 명목으로 강제 몰수당하였다.
옥사 사건으로 옥중에서 고난을 당하였거나 죽은 사람은 동아기독교의 김영관 목사, 김용해 목사, 김재형 목사, 노재천 목사, 박기양 목사, 박성도 목사, 백남조 목사, 신성균 목사, 이종근 목사, 이종덕 목사, 장석천 목사, 전치규 목사(1944년. 2. 13일 옥사, 원산).
위의 명단에서 투옥되었다가 10명은 출옥하였고, 2명의 목사가 옥사하였다. 이종덕 목사는 함흥형무소에서 출옥한 후 1950년 충남 강경교회를 담임하였다가 공산군들이 쫓겨갈 때에 강경 큰 다리에서 공산군에게 학살을 당하였다. 이종근 목사는 3년여의 옥중생활을 마치고 출옥하였다. 노재천 목사, 박기양 목사, 신성균 목사, 김영관 목사, 김용해 목사, 김재형 목사, 백남조 목사, 장석천 목사가 출옥하였다. 출옥하지 못한 사람은 박성도 목사와 전치규 목사(순교) 이상 2명이다.
그런데 「원산시사」에는 동아기독교인 투옥사건으로 7명의 목사와 신도가 옥사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7人이 누군가 하는 것은 현재까진 그 이름을 알 수 없기에 앞으로 밝혀야할 숙제이다.
마침내 일제는 1944년 5월 10일에 동아기독교에 대하여 교단 해체령을 내렸다. 이것은 그동안 갖은 협박과 모진 고문 그리고 투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한 동아기독교에 대한 단말마의 최후의 조처였다. 하지만 이 날은 한국 기독교 역사상 유일하게 교단적으로 교회와 교인들이 한결같이 신앙 양심의 자유를 주장하며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강압에 끝까지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킨 동아기독교의 승리의 날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