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중 누군가의 치매가 의심될 때 각 지역자치센터로 문의하면 명칭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하여튼 “지역치매지원센터” 같은 곳으로 안내를 해줍니다. 안내받은 대로 방문을 해보면 여러 가지 검사를 걸쳐서 최종 치매여부 판정을 내려줍니다. 초기치매인 1기부터 심각한 말기 치매까지 판정에 따라 단계별로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안내도 해줍니다. 새삼 우리나라가 재정적자가 심각하다고는 해도 의료복지가 잘 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런 치매의 정도에 따른 판정 말고, 가족들끼리 하는 말로 착한 치매, 고약한 치매 같은 분류들도 있습니다. 그 중 착한 치매는 그래도 가족들이 견딜만한, 크게 사고치지 않는 얌전한 치매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을 보고 하는 말입니다. 치매가 심각한 분들은 가족 누구도 못 알아보고, 폭력과 폭언을 행사하기도 하고, 자주 집을 뛰쳐나가 찾는데 애를 먹게도 하고, 대소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소위 착한 치매는 그런 보여지는 대단한 어려움이 없어 그렇게 부릅니다.
하지만 그건 그냥 그렇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죄를 얘기할 때, 죄를 조금 지었다고 좀 덜 깊은 지옥에 가서 어쩌면 천국이 손에 닿을지도 모르는 곳에 가거나, 죄를 많이 지었다고 특별히 더 깊은 무저갱에 빠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롬3:23)하셨고, 그 죄의 삯은 구별없이 “사망”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롬 6:23). 그리고 히브리서 9:27에서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심으로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생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롬 6:23) 없이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치매도 똑같은 걸 느낍니다. 대동소이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심하고 덜하고의 극명한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그 치매를 매일 접하는 가족들의 고통과 어려움의 강도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얼마 전 모친을 뵈었는데 몇 번을 지나면서 보아도 알아차리지 못하셨습니다. 가만히 옆에 앉아 있어보아도 낯선 사람이 옆에 앉아 있다고 불편해 하셨습니다. 모친은 지금부터 한 2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며 드문드문 잊으셨고, 그 잊으신 많은 세월 대부분을 집을 떠나 객지에서 살았던 저로서는 모친의 기억 속에 연결시킬 고리가 부족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시리라 생각됩니다. “허허” 웃고 돌아설 때마다 아쉬움과 답답함이 더욱 커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약소한(?) 불편함은 모친 곁에서 매일의 삶을 거들고 게시는 아버님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친을 직접 돌보시려고 요양보호사자격증 시험을 팔순이 넘으신 노인네가 치러내셨고, 때맞춰 병원에 다니는 일, 약을 먹이고, 밥 때를 챙기고, 감추어 놓고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들을 찾아내는 일, 반복되는 실수의 결과물들을 처리하는 일 등등 평생 상상해보지 못한 일들을 일생 말년에 해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만두거나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치매는 그 어떤 것도 착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상을 살면서 예방하기를 힘써야 하고, 만약 시작이 됐다고 하면 초기에 총력대응해서 진행을 늦출 수 있어야 하고, 그래도 늦는다면 가족과 주변이 한마음으로 거들어 짐을 나눠지고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치매는 힘이 듭니다. 그리고 끝이 좋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그런 면에서 끝날 때까지 은혜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아무리 형편 무인지경(?) 가운데 살았더라도 자기의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단번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선물을 약속받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 은혜의 때가 끝나기 전에 구원과 영생의 선물을 힘을 다해 나누는 충성된 성도들이 다 되기를 소원합니다.
배동훈 목사
육본교회 신우담당 사역
육군 대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