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설교가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설교도 가끔 추락하려고 하는 위기를 맞는다.
목회 현역에서 떠나온 나는 프리랜서 설교자로서 은퇴가 없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나는 설교가 모처모일 모장소에서 추락하려하는 듯한 느낌이 있어서 내가 긴장했고 재빨리 추락직전고도를 높여 비행하는 것을 체험했다.
그 사례를 말하면 이렇다. 나는 매주 월요일 모회사 30분 아침 경건 예배를 수년간 인도하고 있다. 내가 그 회사 아침경건예배를 인도할 때 선언하는 설교는 처음부터 복음주의적 십자가 설교를 하기로 작정했었다.
30여명의 사원 중 몇 사람만 교인이 되고 그 외 모두는 아직 불신자인 회사원 앞이지만 조금도 나의 설교의 색깔이나 질을 낮추지 않고 기성교회 성도를 앞에서 하는 그것처럼 했었다. 때로는 나도 놀랐던 사실이었다. 그것은 예수의 예자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도 성경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전했다는 것이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일단 잘 순응하고 경청하며 이해해 주더라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이 회사원 앞에서 초두 설교한 것을 그대로 기신자들의 교회나 신학생 그리고 교역자들의 모임에서 행해도 통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내가 지금 추락하는 설교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윤리설교를 하더라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 캄캄한 이 회사원들에게 우선 교훈적이고도 생활 유용한 어떤 덕담 같은 것도 주어야하지 않겠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나는 재빨리 내 설교의 비행을 고도로 높였다. 윤리설교 안 된다. 심리설교 안 된다. 성공위주설교 안 된다. 그럼 어떤 설교? 늘 계속해 오던 그대로의 복음 설교를 하는 것이었다. 복음 빠진 설교, 곧 십자가 빠진 설교는 어떤 설교이던 인위적 조작적 윤리설교나 심리설교가 되고 만다. 설교를 듣는 대상에 따라 설교 내용의 변화란 설교의 추락이다. 그것은 곧 설교의 변질이다.
십자가 복음 빠진 설교는 혼 빠진 설교려니. 그것은 마치 캡슐만 있고 안에 약은 없는 것과 같고, 앙꼬 없는 빵과 같고, 붕어 없는 붕어빵과 같은 것이렷다. 이제 붕어빵을 사먹고 거리의 사람들은 “붕어”먹을 생각은 아예 없거니와 단지 밀가루와 팥고물 먹는 것이 당연한 줄로 알고 있다.
오늘 날 교인들도 십자가 복음 빠진 설교가 정상인줄 알고 목사도 또 그렇게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양자 간에는 아예 설교에서 십자가 복음 듣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처지다. 딱한지고.
이런 현상은 명백한 설교의 추락이다. 지금 설교는 추락하고 있다. 사탄은 추락하는 설교 앞에 사람들을 더 많이 모이게 하는데 꿩 잡는 게 매라는 물량주의 성공주의 사상이 각인되고 말았다. 그래서 바울의 말씀이 더욱 절실한 현재인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