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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와 음악으로 풀어보는 성경이야기(294)

왕을 깨우는 노래

최고의 전략가 아히도벨의 전략을 물리치고, 위장 잠입한 후새의 거짓전략을 수용함으로써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은 쿠데타에 실패하였다. 반란에 실패한 압살롬은 반란괴수로서의 책임을 죽음으로써 마감해야하는 극단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제 아무리 악한 행동을 했다 할지라도 그가 자신의 아들인지라, 자식에 대한 인정을 과감하게 끊지 못한 다윗은, 요압을 비롯한 자신의 부하들에게 반란은 진압하되 압살롬을 죽이지는 말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군사령관 요압의 생각은 다윗의 그것과 달랐다. 다윗왕의 말년을 불행하게 만들고 다윗왕국의 존립 자체를 위협한 모든 사건들의 진원지가 압살롬이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를 살려두면 안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압살롬이 패전하여 도주하다가 풍성한 머리카락으로 인하여 나뭇가지에 걸려 대롱거릴 때 요압은 창으로 그의 심장을 찔러 죽였다. 아들의 죽음이 알려지자 다윗은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하는 비가로 울부짖으며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의 울부짖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적당한 선에서 그쳐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의 울부짖음은 요압이 왕궁에 돌아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요압은 분노했다. 말년에 판단력과 자제력을 상실한 다윗이 개인적인 정리에 집착하여 심기를 바로잡지 못하는 것 또한 또 다른 국가의 위험요소라고 생각한 요압은 왕에게 대들었다.

사무엘하19:6에 기록된 바와 같이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라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 하였나이다하는 말로 왕에게 자신의 서운함을 표현한 요압의 외침은 그 당시의 황당한 상황을 잘 함축하고 있다. 아무리 자신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죽임을 당하는 것이 국가의 안녕과 평화와 안보를 지키는 길이라면, 한 나라의 왕으로서 냉정하게 압살롬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상식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 상식수준에조차 미치지 못하는 해괴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데모진압을 위한 물대포에 맞아 다쳤다고 요란을 떠는 데모주동자들은 자신들의 불법적인 시위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다. 불법시위하다가 다친 사람은 스스로 책임을 지면 그만이다.

선진화된 나라치고 죽창과 쇠파이프와 인화물질과 깨진 보도블록을 무기삼아 시위하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폭력 없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시위하는데 물대포를 쏘겠는가. 불법으로 도로를 점거하여 자신의 나라의 수도를 마비시키는 행동을 수없이 반복하는 포악한 시위에도 눈을 감는다면 그게 어디 공권력이라 할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에게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있다. 하지만 그 집회와 시위는 정해진 법과 규정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순간 그 효력을 상실한다. 자신들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왜 다른 사람들의 자유는 짓밟는가.

우리나라가 독재국가인가. 우리나라가 독재국가이면 북한의 김 씨 정권은 도대체 무엇인가. 세계 어디를 가 봐도 우리나라만큼 자유가 많은 나라도 별로 없다. 불법시위를 벌이고도 엄정한 법의 제재를 받지 않고, 불법시위하다가 다쳐도 영웅대접 받는다는 사실이 우리나라가 자유가 충만한 나라임을 증명하고 있다.


일부 정치지도자들의 마인드는 더욱 심각하다. 공산혁명을 꿈꾸는 자를 옹호하고, 불법시위를 벌이다가 제풀에 다친 사람을 무슨 영웅취급하며, 다수의 국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정당한 공권력을 행사한 사법기관을 향하여 삿대질하는 행동은 정상이 아니다.

마치 반란수괴 압살롬을 처단했더니 자신의 자식이 죽었다고 울부짖는 다윗의 노망과 진배없다. 아무리 자신의 자식이 죽었다 할지라도 압살롬은 나라의 안녕과 법통을 짓밟은 역모자가 아닌가. 무엇이 더 중요한가. 법치로 통치되는 자유민주주의국가의 존립과 안녕과 안보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는가.

노주하 목사 / 찬양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