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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국 목사의 회상록>-성공한 목회자?!

가끔 성공한 목사, 전도사, 선교사 또는 목회자란 말을 들어왔다. 그런데 그 성공이 무엇이며 누굴 가리키고 있는가? 자기 공(功)을 세운 성공자가 될 때 어떤 결과를 낳는가? 교인 숫자, 교회당 건물의 크기, 목사의 인기의 고도 등등을 가리켜 성공한 목사라고 불리우는가?


60년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대흥교회에 출석하며 4년간 여러 가지로 봉사해 왔는데 신학교 교장 도월태 선교사는 주일 예배 전 성경공부를 인도하셨다. 침례교회에는 목사와 집사(행6:1~6)의 두 직분 밖에 없다고 가르쳤고, 목사는 곧 장로이며(벧전5:1) 감독자(딛1:7)이며 하나님의 청지기(廳直이)라고 했다.


교회의 장로들을 감독자로 삼고 교회를 치게 (보살피게) 하셨다고 했다.
교인만 청지기 직분(Stewardship)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인 목사도 바로 교회의 청지기라고 가르쳤다. 오랜 세월 동안 목회를 하면서 그때 배운대로 주님의 청지기로서 사명을 다짐해 왔다.


서울교회에 왔을 때 육군대령 안수집사가 자기의 명함에 사무처리회 의장이란 직명을 기록한 것을 보고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떠올랐는데, 한번은 저를 보고 “목사님 군대에서 제대할 때 계급이 무엇이었느냐?”고 해서 “원주 춘천에서 군인복지센터 관장으로 사복근무를 하다 보니 계급을 몰랐는데 제대할 때 일군사령부에 가니 하사 계급장을 주어 일반하사로 제대했지요” 했더니 그는 느긋이 웃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목자이며 목사이고 한 목사는 그 밑에 목동이다”고 말했다. 그 말은 두 가지로 상반된 뜻을 알게 해 주었다. “목사도 성경은 청지기라고 하지요”라고 대답했고 청지기 목회를 해왔기에 20년 은퇴를 잘 마쳤다고 생각한다.


구약에서 청지기는 주인의 종이요 재산관리의 우두머리 종(창43:19, 단1:11)이며, 신약에서는 노동자의 감독 및 재산관리자이며 그리스도인의 직책(고전4:1, 벧전4:10)으로 바울 사도는 지적했다. 집의 청지기(steward of the house)는 먼저 에피트로포스로 맡기다의 명사이며, 다음으로 오이코노모스는 오이코스(집)에 네모(돌보아 준다)의 합성어로 집을 돌보는 자로 오늘의 관리인이며, 당시 귀족이나 부자집의 하인들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과 청지기 비유(마20:8), 진실한 청지기와 주인(눅12:42), 어떤 부자와 불의한 청지기 (눅16:1이하), 베드로는 옳지 않은 청지기(벧전4:8)를 언급한 후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


타국 가는 주인이 그 종들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소유를 맡기는데 금 5달란트, 2달란트 및 한 달란트의 비유(마25) 및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가면서 10종들에게 각각 은 한 달란트를 맡기는 비유를 말씀하셨다.
5달란트 및 10달란트를 남겨 칭찬을 받았으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숨겨뒀다가 주인에게 바치자 주인은 그 종에게 엄벌을 내리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주인이 가로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마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마25:23) 하였으나 감추어둔 종에게는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25:26~30) (참조 눅 19:23~24)


예수님은 자신이 받은 달란트대로 갑절, 다섯 갑절 또는 열 갑절 남긴 청지기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했다. 목사는 주의 종으로 종은 곧 주님의 청지기로 다만 충성만 있을 따름이지 성공은 없다. 자기의 맡은 일에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남을 따름이지 성공자가 되면 자신이 공로자가 되어 분수에 넘치고 교만하게 된다.


그리고 넘어지는 우매한 자들이 신구약 성경에도 많이 나타난다. 청지기로서 목동은 목자장 예수에게 영광을 돌릴 것이지 그 충성의 열매인 영광을 하와처럼 따먹으면 넘어지기 일쑤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이제 신약성경으로 돌아가 살펴보자.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행10:25~26). 그는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에게 ‘나 베드로의 이름으로 일어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높이고 그의 부활을 증거했기에 죽은 여성도 다비다를 일으켰고, 심지어 베드로의 그림자가 덮여도 병자가 낫고 더러운 귀신도 떠나간 것이다(행5:15~16). 그러나 어찌 예수님을 제쳐놓고 무릎 꿇는 경배의 절을 낚아챌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19:11~12)했는데, 바울이 1차 전도여행시 루스드라에서 발을 쓰지 못하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쳤을 때 사람들은 바나바를 쓰스(제우스)라 하고 바울을 헤메(헬메스:제우스 주신의 대변자)라 하고, 쓰스 신당 제사장이 소와 화환을 가지고 와서 제사코자 했다.

그때 바울은 옷을 찢고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행14:15)하며 극구 말려 제사하지 못하게 했다. 인간이 뭔데 감히 오만스럽게 경배를 받을 수 있겠는가?
언젠가 경기장에서 20여명의 목사들이 사과하며 엎드려 절했을 때, 어떤 목사는 베드로나 바울처럼 행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주의 종들에게 경배를 느긋이 받은 뒷날이 걱정되었는데 과연 목회 말년의 그림자를 보게 되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는 물론 한국교회나 저가 다녀본 수많은 외국교회의 목회자가 청지기로 남지 아니하고 위세를 떨칠 때, 그 종말은 언제나 같은 길로 가고 있음을 많이 목도하고 전해 들었다.
끝까지 목자장 되신 주님께 겸손하고 충성스런 청지기로 하나님께만 영광돌리기가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지만 검은 마수의 유혹과 미혹을 물리쳐 이겨야 한다. 성공한 목회자는 교회가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고 충성의 척도와 영광은 언제나 하나님께 돌리는 겸손이 따른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요5:41)고 하셨고,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요8:50)라고 말씀하셨으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6:13)라고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눅6:26)라고 하시며 우리가 칭찬받을 때 자고하지 않도록 경계시키셨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5~6)


한명국 목사 /BWA전 부총재/예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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