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아파트 동에 유난스럽게 키가 큰 남정과 외모도 그만그만한 부인 부부를 엘리베이터를 타노라면 가끔 그 안에서 만나게 된다. 사실 나는 이 아파트 동이 세워지는 20여 년 전 해부터 입주했기에 이 아파트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면 사람들로 하여금 인사를 꼭하도록 교육하는 도덕선생과도 같다. 이 삭막한 세상살이에 노인다운 처신일 것이다.
나는 이 키다리 미모 부부에게도 일찍 내가 목사라는 신분을 밝히며 인사를 청했었다. 그래도 만날 때마다 무반응 무표정이기에 나는 나의 경력을 자세하게 일러 주기도 했다. 신학교에서 교수도 했고 은퇴하고서는 개척교회도 했고 지금은 프리랜스로 설교하러 다니고 등. 그래도 그 키다리 미모 부부는 자기들과는 아무상관도 없다는 듯 했다. 만날 때마다 가볍게 끄덕이면 될 인사가 없기는 여전했다. 참 희한한 사람들이군. 그들은 50대 전 반 같은 나이를 먹은 듯했다. 나는 그들의 마음속을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 교회에서 특별집회가 있기에 나는 참여했었다. 예배 전 찬양시간이 있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키다리 남정이 유난히 큰 키에 또 고음으로 손뼉을 치면서 찬양그룹에 속해서 찬송을 부르고 있지 않나 말이다. 순간 저 사람이 교인이었던가? 내 눈을 의심했다. 눈을 닦고 봐도 틀림없이 나의 아파트동의 그 키다리 사람이었다.
순간 내 입에서는 고약한 사람인지고라고 가벼운 소리가 나왔다. 그만큼 목사 목사 목사라고 나를 소개했건만 어쩌면 그렇게 무반응이었을까? 그런데 그 사람의 마음바탕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당신은 남의 교회목사니까…”이다. 남의 교회목사와 자기와는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라는 것이다.
내 교회의 내 목사는 귀하시되 남의 교회 남의 목사는 귀하신 분도 아니고 그 또 자기와 아무관계도 맺을 필요가 없다는 것.
다시 말하면 남의 교회 남의 목사와는 거래(去來)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것. 나는 지금 여기서 거래라는 상업적 용어를 쓰고 있다. 남의 교회 남의 목사가 자기 위해 복 빌어 줄 턱도 없고 나도 남의 교회 남의 목사를 위해 기도해 줄 것도 없다는 것.
마치 남의 교회 남의 목사 보기를 차라리 뒷동산 절간의 중 보기만도 못하게 보는 저 이웃교회 소위 성도의 눈초리가 언제쯤 제자리로 돌아올까? 그날 그 키다리 성도는 눈을 감고 그 큰 손이 찬양을 인도하고 있었으며 그 밑에 앉아 있는 성도들은 그런 몸짓에 은혜가 넘치는 듯 손뼉을 치고 앉았고. 거기 앉아 있는 나는 마음속 깊이 서글픔에 슬픔까지 느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가족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차가운 벽으로 갈라놓게 되었는고!
그 다음날 그 키다리 장년을 만나서 “당신 찬양인도를 참 잘 하시는데요”라고 하니까 그래도 그냥 무반응. 찬양인도를 잘하든 말든 남의 교회 남의 목사가 웬 참견이냐는 식. 참 어려운 사람이구나.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냄새를 조금도 맡아 볼 수가 없어서 괜히 내 코를 실룩거려보았던 것이다.
그 키다리를 성도라고 하기에는 영 신학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고민스럽기도 하다. 그를 무엇이라 부를까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