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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심리학자가 본 동성매력장애

동성애는 죄인가, 병인가, 대안적 생활스타일인가?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태도

교회사적으로 볼 때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태도는 네 가지로 나타났다. 동성애적 성향과 행위에 대한 개신교회의 입장은 대략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우선 가장 두드러진 입장으로 징벌적 거절의 태도(rejecting punitive position)가 있다. 이러한 태도는 대체로 성경의 구절들을 사회문화적 맥락을 따라 읽지 않고 문자적으로만 읽는 신학적 입장에 근거한 것이다.

개신교내 동성애에 대한 두 번째 입장은 비징벌적 거절의 태도(rejecting non-punitive position)라고 할 수 있다. 이 입장에서는 동성애가 비자연적이며, 우상 숭배적이고, 또한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거스리는 행위라고 평가하지만, 동성애적 성향과 행위를 구별하고, 또한 동성애적 행위와 인격을 구별함으로 동성애주의자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확보하는 입장이다.

즉 행위에 대해서는 죄로 규정하지만 인격으로서의 동성애 주의자들은 목회적 관점에서 영적인 배려와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개신교내 세 번째 입장은 적절한 수용의 태도로서 동성애의 성향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 가능성(qualified acceptance position)을 전제하는 입장이다. 즉 어린 유년기에 자리잡은 동성애적 성향을 교정하기 어렵다는 사회과학적 연구결과를 받아들임으로, 동성애적 성향과 행위를 이성 연애적 문화적 가치에 의해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입장이다.

마지막 입장은 이성 연애적 성향과 행위가 합법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인식과 동일하게 동성애적 성향과 행위를 합법적이며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unconditional acceptance position)이다. 여기에는 이성 연애적인 성향과 행위가 인간의 성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는 문화비판적인 전제가 내재되어 있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은 두 번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성윤리학자 스탠리 그렌츠(Stanely Grenz, 1990)는 경향성으로서의 동성애는 정죄할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최선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며 일정한 위험을 제기하고 있다.

동성애는 불완전한 발달 상태와 충족되지 않은 욕구 상태에 있는 미숙한 자들로서 정죄할 대상이 아니고, 다른 타락한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필요가 있는 대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는 우리는 성경과 감리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동성연애, 동성결혼을 반대하며 일부일처주의 가정의 신성함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동성애자들의 아픔을 이해하며, 그들의 인권을 존중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것이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3. 동성애와 동성혼은 죄다.

동성애는 동성 간의 성교를 통해 성적 만족을 얻는 장애를 말한다. 동성애가 죄인가, 아니면 대안적 생활스타일인가? 1969년 뉴욕 경찰은 동성애 지향을 가진 사람들을 급습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은 동성연애 행동주의 시대’(gay activisit era)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동성애 자체는 새로운 이슈가 아니다. 그리스에도, 히브리 사회에도 동성애는 존재했다. 로마제국에 그러한 행위가 너무 만연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삼가야 할 이방인들의 죄 가운데 동성애 행위를 언급했다. 서구세계의 기독교화도 동성애 활동의 폐지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와는 반대로, 교회 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은 교부시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를 안고 씨름해왔다.


19세기 이전에는 동성애가 정상적인 성관계의 왜곡으로, 비정상인 것으로 간주되어 사회적 비난을 받았었다. 그러나 현재의 관점은 동성애를 평생가는 개인적인 지향으로, 성도착으로 정의하고 있다(Grenz, 2003).

첫째로, 19세기에 시작된 현대 심리학 분야의 부흥은 그 현상에 대한 이해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동성애를 정상적인 성적 지향으로 보는 시각이 수용되기 시작했는데, 병리학적, 정신의학적 조건의 목록에서 동성애를 삭제해야 한다는 미국심리학협회의 1974년 결정이 이러한 변화의 시발점이 된 셈이다.

두 번째로, 새로운 사회적 상황, 즉 동성연애 행동주의가 이제 새롭게 정의된 성적 지향에 대한 윤리적 논의의 배경을 이룬다. 이제 동성애 행동주의자들은 사회가 동성애 행위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 뿐만 아니라 동성애 지향을 합법적이며 대안적인 삶의 스타일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사회적 태도의 변화는 교회 내에 있는 기독교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새로운 사회적 상황은 우리에게 엄청난 도전으로 나타나고 있다. 동성애와 동성혼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동성애는 죄인가, 아니면 대안적 성적 표현인가?

동성애와 죄. 성경본문에 반영되는 동성애 이해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이 성경본분들은 동성애를 죄라고 선언하는가?


동성애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성취할 수 없다. 성경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라고 했지 아내의 역할을 하는 사람과 합하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 성경은 말한다. “여자와 눕듯이 남자와 눕지 말라. 이것은 가증스럽다(18:22). 남자가 여인과 눕듯이 남자와 눕는 경우는 그 둘은 가증한 일을 행했으니 그 둘이 반드시 죽게하라. 그들의 피가 자신에게 있을 것이라”(20:13). 동성애는 가증하다고 했다. 윤리적 도덕적으로 혐오스럽다(detestable). 망측한 짓이라는 뜻이다. 동성애에 대한 심판으로 사형을 명하고 있다. 성경은 분명히 동성애를 사형에 해당하는 가증한 죄로 보고 있다.


신약시대에도 바울은 남자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것(1:26),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고전 6:9), 남색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유다서와 베드로서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동성애와 성적인 음란함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원인이라고 말하면서 더러운 정욕에 빠져서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윤리학자들은 동성애를 죄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첫째, 동성애 수용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 지향 자체와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들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지자들은 이런 행위가 여러 사회와 역사 전체를 통하여 그 현상이 현존하는 것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리스나 로마사회에서도 동성애는 일탈행위로 간주되었고, 일반적으로 불법적인 것이었다(Grenz, 2003)

신학자 칼 바르트는 동성애를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의 타당성을 용인하기를 거절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육체적, 심리적, 사회적 질병, 성도착 현상, 타락과 부패라고 하였다.

동성애에 개방적인 학자들도 항문성교는 명백한 범죄에 해당한다고 선언한다.


레위기 1822(너는 여자와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안 된다. 그것은 망측한 짓이다)2013(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이므로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은 그 실천적 효과에서 명백한 것이다. 이스라엘 남성들 사이에서의 동성애 관계는 금지되었고 사형으로 처벌될 수 있었다”(Lance, 1989).


바울은 어떤 근거에서 이성애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동성애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주장했는가? 바울에게 적절한 성관계의 유일한 모델은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창조기사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다.

바울은 레위기 성결법전의 훈령을 유지하면서, 이러한 모델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결론을 맺는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창조자에 의해 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동성애 관계는 그것이 남성 사이의 관계이든지, 아니면 여성 사이의 관계이든지 창조 자체 내에 덜어있는 패턴에 위배되기 때문에, 자연을 거스리는 것이다.


한 사람의 동성애가 유전적 기질의 탓이냐, 아니면 후천적 심리적 요인과 부모관계에서 기인한 것이냐는 문제가 개인이 그것을 의식적으로 선택했다기보다는 이러한 지향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변경시키지 않는다. 대부분의 개인들은 어느 정도 능동적으로 개인적 성적 지향의 발전에 기여한다. 그 상황이 개인적, 의식적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책임이 남아있다. 우리는 나면서부터 죄성을 지닌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자의적인 선택. 일부 인기 있는 책들은 동성애는 미묘한 선택의 결과라고 제시해왔다. 이 관점은 동성애란 의지로 포기할 수 있으며 자의로 자신의 삶을 정화할 수 있다는 선택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 사이에 흔하다.

동성애가 고의적인 선택이라고 하는 이 관점은 기독교인 전문 상담자를 포함해 노련한 전문가들의 생각이 아니며, 동성애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생각도 아니다. 고의, 그리고 의식적으로 자신과 같은 성을 가진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일은 있다 해도 드물다.


성인이 되어가면서 일부 사람들은 미묘한 선택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끌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이 깨달음은 대단히 혼란스러워서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자신에게도 그 사실을 감추려고 노력한다. 종종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동성애라는 유전적 소인을 가지고 태어났음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리곤 한다.


동성애와 이성애 경향은 둘 다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 이미 얻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매혹의 느낌은 잘못 된 것이 아니다. 같은 성이건 다른 성이건 끌린다는 느낌은 사랑과 인정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러한 성적 매혹에 대한 한 사람의 행동이 항상 사회적 혹은 성경적으로 적절한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같거나 다른 성을 지닌 누군가와 성적 행동을 함으로써 쾌감을 얻을 때마다 그 성적 행위는 다음번에 더욱 매혹적으로 되어간다. 그 행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성적 행위를 계속하는가의 여부이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지나가는 성적 만남은 그 만남이 같은 성이라 할지라도 특별히 만족스럽지는 않다. 따라서 그 만남은 되풀이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배경과 경향이 취약한 사람이라면 한 번의 성적 경험은 다음의 한번으로 또 이끌고 그리고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동성애 행동 (동성애 판타지로 자극받은 자위를 포함해)은 동성애 경향을 더욱 크게 하며, 그 경향은 다시 행동을 되풀이하게 한다. 물론 이성애 경향을 지닌 사람이 반대 성의 사람과 성적 행위를 하기로 선택했을 때 역시 비슷한 주기가 시작될 수 있다. <계속>

 

/ 정동섭 목사

가족관계연구소 소장

강남중앙교회 협동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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