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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의 머리기사로 남는 인생

사람이 역사를 만드는가, 역사가 사람을 만드는가,’에 대한 논의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 시대마다 필요한 사람을 보내시고 보내신 사람을 지도자로 세워 역사와 민족을 이끌어 가신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2008823일 영결식과 함께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잠들었다. 수많은 인파가 국회 앞마당과 서울 광장에 모여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언론의 취재 경쟁도 뜨거웠다.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외국 주요 언론들도 김 전 대통령 영결식과 영면의 현장을 생생하게 중계했다. 인동초의 한 생애, 격랑의 시대 맨 앞에서 온 몸으로 떠안았던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떠나가는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은 엄숙했고 숙연했다.

석 달 전 우리는 또 한분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나보냈다. 그러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물론 노 전 대통령은 갑작스런 서거로 충격과 놀람이 컸던 반면 이 번에는 예견되고 준비된 서거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에서 가득했던 분노에 가까운 울음소리 가 이번 국장에서는 엄숙하고 숙연한 모습이었다.


분향소 분위기도 사뭇 달랐다. 노 전 대통령 조문 때와는 달이 오열하거나 격한 감정을 표출하는 대신 조용히 기도하거나 존경하는 시선으로 영정을 바라보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무엇보다도 김 전 대통령께서 병실에 있는 동안 병실화해가 이루어지는 장면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전 현직 대통령, 여야 진보의 이념의 벽을 넘어 비록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병실을 찾고 남겨질 가족들을 위로함으로 아름다운 화해가 이루어지는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분, 대권에서 경쟁자로 대선을 치른 분들, 자신을 죽음의 고비로 몰았던 전직 대통령의 딸, 무엇보다도 평양에서도 조문 사절단이 옴으로 경색된 남북관계가 조금이나마 소망을 갖게 한 일들 참으로 많은, 그리고 많은 변화들을 이끌어 냈다.

나는 네 개의 일간지와 다수의 주간 신문을 본다. 대개의 주간 신문은 내가 속한 교단의 신문을 비롯한 교계신문이고 매일 배달해오는 일간신문은 각각 성향이 조금씩 다른 신문을 고루 섞어서 보고 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신문을 읽는 순서가 정해져있다. 우선은 신문이 오면 제 1면에 머리기사를 읽고 그리고는 사설을 읽는다. 머리기사는 그날에, 혹은 전날의 가장 큰 관심사를 한줄 로 기사화한 말이다. 그리고 사설은 우리가 관심거리로 생각하는 일과 사건에 대한 재해석과 평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읽다보니 습관처럼 신문을 읽는 순서가 되어버렸다

 

역사적 사건을 전하는 신문의 머리기사와 사설은 또 다른 역사의 기록물로서의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면 신문은 1면 구성에 공을 들인다. 제목을 어떻게 뽑을지, 기사의 첫 문장을 어떻게 전할지, 1면 사진을 어떤 것을 배치할 것인지 하나하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생전에 참으로 많은 일들을 하셨다. 물론 남긴 업적가운데는 공() 도 있고 과()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도 있도 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분이 떠나시던 날 세상의 언론은 그의 생애를 한마디로 이렇게 머리기사 1면에 올렸다. 내가 구독하는 신문의 머리기사이다.


화해 통합의 꽃 피우겠습니다”-국민일보 해 통합, 큰 뜻 남기고김대중 전 대통령 영면”-중앙일보 화해와 용서,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달라”-한겨례 화해-통합 씨앗 심고 영원의 길로”-동아일보

나를 주목케 한 단어. ‘화해’ ‘용서’ ‘통합그분의 삶을 한 줄로 표현하는 말이다. 그래서 세상은 그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했다. 그리고 그렇게 사신 분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다.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는 법이다. 올 때가 있고 갈 때가 있다. 조금 오래 머물다 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좀 덜 머물다 가는 이가 있다. 그러나 인생은 길던 짧은 이 세상을 떠 날 때는 한 줄로 남는다. 아니 한마디로 남는다.


중요한 것은 인생은 출생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기억된다는 사실이다.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다가 죽었느냐, 로 기억된다는 사실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언론이 1면 머리기사로 올린 화해’ ‘용서’ ‘통합이 세단어가 오랫동안 가슴에 여운으로 남는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직분을 우리에게 주셨으니화목케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느니라” (고후5:18,19)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 반종원 목사 수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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