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라이프찌히 선교사로 간 54세의 목사 선교사아들이 이미 그곳간지도 15년 세월이 흘렀고 가끔 고국부모 찾아오길 그래도 여느 선교사보다는 잦은 셈이다. 부자간에 갖고 있는 목사 철학 때문이다 부모도 선교의 제1대상이라는 생각이 아들선교사 목사의 선교관이기 때문이다. 그 선교관에 아내도 동의해 준지가 아예 선교지 떠날 때였다.
독일에 무슨 선교사가 필요하냐면서 사람들은 선교 지원하기를 꺼린다. 그러나 듣고 보면 동남아의 어떤 나라 못지않게 선교가 필요한 곳이 바로 유럽이요 그 중에도 유럽 선진국이라는 데에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문화에 젖어 있을 뿐이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근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관점에서 아들 목사 선교사는 그놈의 문화의 벽을 넘어 "알 예수님(Naked Jesus)"을 소개하는 복음사역지로 일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름도 빛도 없이 아비목사인 내가 아들선교사의 후원회장(?)이 되어 15년을 돕고 있다. 모금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유럽선교의 필요성을 말하고 애써 모금한 선교헌금을 매달 꼬박꼬박 보내는 마치 쪼들리는 사장님이 직원에게 봉급주는 기분 같기도 하다.
그런데 선교사 목사아들이 한국에 한 달 체류하다가 그의 딸 혜주와 함께 독일로 귀국하는 날이 되어 아비인 내가 인천공항까지 전송하러 나갔지. 비행기 티켓팅을 끝낸 아들선교사가 마지막 작별인사를 악수로 청하기에 내민 나의 손바닥에는 누런 종이 몇 장이 놓여 있었다. 슬쩍 보자 하니 5만 원짜리 지폐 4장이었다.
이것을 받는 순간 아들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는 것을 막을 길 없어 엣따 흘릴 만큼 흘러라 하고 눈물을 공항 바닥에 흘렸지. 50중반을 넘어 60을 향하는 아들에게 솔직히 지금까지 아비가 후원만 했지 한 푼 받아 본 기억이 없는지라. 이 거금을 받다니. 이것은 아들선교사에는 확실히 거금이다. 아들이 불효하거나 무정해서 결코 용돈을 안 준 것이 아니라 오매불매 선교일념으로 그는 한 푼씩 모은 돈으로 동남아 다른 선교사들을 또 돕느라고 여념이 없었고, 게다가 아비 걱정 말고 선교하라는 강력한 아비의 명령(?) 때문이었다.
나의 동역자 은퇴목사들 중에는 아들과 딸과 혹 사위가 의사니, 변호사니, 교수니, 사장이니 하면서 용돈을 푹푹 쥐어 준다는 말을 할 때에 나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리고 부러워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이 “그대들 고맙소” 속으로 말하면서 용돈 못 주는 내 자식도 대단하다오라고 평상심(平常心)을 잃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아들선교사 목사가 건너 준 20만원은 자기도 선교 모금해서 귀국하여 선교할 항목을 조목조목 갈라놓고선 크게 힘을 써서 주는 20만원이라는 거금(?).
이 20만원은 어떤 돈인가? 애정이 묻은 돈이요 의미가 있는 돈이며 액면 이상의 가치가 있는 돈이며 철학이 담긴 돈이다.
거래하는 돈 중에는 단순히 종이도 있고 오히려 받고 보면 화지(禍紙)가 되는 것도 있지만, 오늘 출국하면서 아비 손에 넣어준 20만원은 그대로 복지(福紙)였다. 아들은 자기 딸의 손을 잡고 gate를 지나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버지, 선교사 목사 아들 둔 까닭에 용돈도 한 푼 못 얻어 쓰시는군요. 죄송합니다” 하는 듯 하고, 나는 되려 아들을 향해 “아들, 재벌 아비가 아니라 목사 아비라서 아들에게 큰 돈 대물러 주지 못해 미안하군” 하는 듯. 선교지로 떠나고 떠나보내는 부자간에는 값 무거운 무언(無言)의 대화가 흘렀다.
묻노니 그대들이 주고받는 돈 속에 철학이 있느뇨? 의미가 있느뇨? 그게 없다면 최악으로는 매소부(賣笑婦)의 화대(花代)일 것이고 기껏해야 상거래(商去來)의 교환수단지 아닐까. 요사이 세상에 워낙 “돈” 때문에 人間세계가 파괴되고 있기에 돈의 표상(表象)을 좀 험삼 굳게 말해 본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