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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동사(動詞): 부활

윤양수 목사 / 한소망교회

지인의 아파트에서 나오다가 우연히 보았습니다. 한 청년이 아파트 유리 현관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지더니 옆으로 돌아서서 옷매무새를 다듬고 다시 앞으로 돌아서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요리조리 유심히 바라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 모양입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솜사탕같은 설렘이 느껴졌습니다.


그 청년이 만날 사람은 알까요? 그가 이런 설렘을 가지고 자신에게 오고 있다는 것을요. 미소 지으면서 그 아파트를 나와 버스정류장을 지나는데 기다리는 사람들의 무리 중에 한눈에 들어오는 얼굴이 있었습니다. 아까 그 청년이었는데 멀리서도 두 눈은 반짝였고 입가는 미소가 햇살처럼 번져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이 온통 사랑으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버스가 정차하고 버스에서 내린 한 자매가 그의 환한 얼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자매는 알까요? 버스가 도착하기 전부터 그가 초롱초롱한 별빛과 반짝이는 햇살같은 마음을 가지고 기꺼이 찬바람 속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요. 우리에게도 그런 분이 있습니다. 나에게 오기 위해 예비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보이실 사랑의 완성을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을 동참하는 기간을 보내면서 이런 설레임이 얼마나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귀한 단어들- 고백하기, 회개하기, 살기, 반응하기, 성장하기, 도약하기, 변화하기, 씨 뿌리기, 달리기, 춤추기, 노래하기, 사랑하기 등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고난부활은 명사 같지만 동사입니다.


명사는 멈춰있지만 동사는 움직입니다. 명사는 창조된 우주와 물리적인 실제로 인해 존재할 수 있지요. 하지만 우주가 명사 덩어리라면 그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에게는 은총이 가득하고 생명력 넘치는 동사를 죽은 명사나 썩은 냄새가 나는 원칙으로 바꾸는 재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면 성장하고 살아있는 건 죽게 됩니다. 성경에서도 가진 것이 많아 늘 소유한 재산만을 알고 있는 부자청년에게 주님은 필요한 자에게 그 재산을 나누어주면 그 재산은 기쁨이 되고, 웃음이 되고, 복이 되는 것을 경험하는 복을 재산으로 소유해보는 경험을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십니다. 명사로서의 재산만을 알고 있는 부자청년은 동사가 되는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근심하며 갔다고 말합니다.


윌리엄 폴 영의 소설 <오두막>에 나오는 글에 보면 사람은 명사이지만 동사인 살다로부터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산다는 무수히 많은 또 다른 동사를 동반합니다. 보다, 듣다, 말하다, 생각하다, 걷다, 느끼다, 먹다, 자다, 받다, 주다, 원하다, 사랑하다, 아프다, 미워하다, 깨닫다, 움직이다는 동사들을 파생합니다.

일례로 이라는 단어도 그것을 가장 잘 증명합니다. ‘보다라는 동사에서 왔다고 합니다.

추워서 웅크러져 있어서 겨울에는 안 보이고, 못 보고, 볼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이 간질간질한 봄에는 아지랑이가 보이고, 새싹이 보이고, 꽃이 보이고 하는 것들이 다 명사를 명사되게 한 동사의 힘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봄에 부활을 말하고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자연학습법이며 시청각을 활용한 개념학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봉오리를 모으는 목련 속에서 부활을 봅니다. 졸졸거리는 개울물에서 부활을 듣습니다. 강단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부활을 말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느끼며, 주님의 말씀 먹기를 원하며 주님 때문에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지, 내 속에 있는 죄악을 얼마나 미워하고 있는지, 부활을 화석시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움직이고 있는지, 끊임없이 쉼 없이 움직이는지, 몸과 정신이 살아 움직이는지.......


저에게 2016년 부활절은 교회의 부설기관으로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에서 자살을 생각하고 자살시도를 여러 차례 할 정도로 삶이 고단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를 듣자하니 오죽하면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면서 물었습니다. “지금 무엇을 가장 해보고 싶은지요하고 물었더니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많은 이유중에 무엇을 해도 행복할 것 같지 않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분의이야기를 들으면서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수고와 땀이 없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지도 않았고, 사랑하는 어머니하고도 능동적으로 다가가지 않았고, 이혼한 아내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수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본인도, 아들도, 어머니도 행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행복을 얻기 위한 몸과 정신의 움직임이 없었고, 있더라도 어쩌다가 한번 해보았는데 상대방의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움직이지 않다보니 행복은 화석이 되었습니다. 분명 행복할 수 있는 요소들은 다 있었는데요. 그러다 보니 이제 와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향을 설정하고 적극적인 행동을 하려고 합니다.


이 부분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죽고자 하는 적극성을 살기 위한 적극성으로 바꾸어보자구, 옆에서 도와주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지금은 그 분이 밥 먹는 일, 정상적인 시간에 일어나는 일 등으로 서서히 일상적인 생활을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부활은 그렇게 저를 움직이게 합니다.

부활하심으로 사망을 이긴 첫 열매로서의 주님을 기뻐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렇게 부활은 내 속에서 나를 움직입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Hallelui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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