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2)
전세 들어 사는 아파트 단지 내에 금, 토요일 오후에 4,000원 주면 간이 목욕탕에 들러 주일 준비 목욕을 하는데 오늘은 노인 한분이 목욕하고 있어 인사를 하고 가끔 하듯이 친절하게 등을 잘 밀어드렸다. 대화가 자연스럽게 오가면서 건강에 대해 얘기를 하던 중 대학시절엔 건포마찰과 냉수마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건국대학교의 설립자였던 유석찬 박사가 늘 했다는 냉온욕도 해왔고 또 요사이 유행하는 반신욕을 설명하고 같이 하자고 하니 비록 비만한 몸이지만 반신욕과 냉온욕을 일곱 번 잘 따라했다.
나이를 물으니 70대 중반이라고 했다. “언젠가 롯데호텔 로비에서 정주영 씨를 만나 좋은 얘기를 하려고 인사를 하고 옆자리에 앉으려는데 그를 둘러선 5-6명의 호위자들에 의해 제재를 받으면서 헤어졌는데 그 때 나이가 74세였는데 얼굴에 검버섯, 사람들이 말하는 저승꽃이 10여개나 피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오늘 선생님의 등을 밀어주면서 피부와 얼굴을 보니 너무도 깨끗해서 아마도 천수를 누리실 것 같다”고 했더니 웃으며 기뻐했다.
저를 보시고 갑장생 같은데 어찌 그리 곱고 건강하시냐고 물으시기에 사실 요사이는 건강에 대한 정보가 많지만 음식, 운동, 휴식 등등도 좋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평안이 건강에 제일이라고 설명하고 성경에 보니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느냐는 물음에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눅17:21) 대답했어요. 마음의 천국이 이뤄지면 몸도 따라서 건강해지지요 라고 대답하고 신앙생활의 축복을 간증했다.
가끔 단 두 사람이 만날 때는 개인전도하기가 가장 좋은 기회이다. 예수님도 복음서와 특히 요한복음에서 개인전도 하신 기사를 주의 깊게 우리가 읽는다. 저로서는 특별히 개인전도 상담을 통해 복음을 전하기에 힘쓰는 동기가 하나 있는데 아래에 기술하는 이경미 자매의 자살 충격이 오랫동안 개인전도에 힘쓴 계기가 되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9:22)
첫 목회지 도안교회와 이원교회에 이어 노영식 목사의 간청에 못 이겨 세 번째로 문을 닫을 지경이 된 남문구교회에 1970년 9월 첫 주에 부임했다. 3일간의 교회당의 청소 후, 교회의 이름부터 남문교회로 고치고 장기간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12명의 교인이 30명으로 늘어났고 또 누가 누구인지 잘 아는 터였는데, 주일 아침 김선영 자매가 친구를 인도해 옆자리 앉힌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을 영적으로 직감했다.
김선영 자매는 전북 시골 소녀로 부산에 와서 일했는데 동료 공장직공을 인도해 온 것이다. 예배 후 즉시 새신자 상담을 청했는데 3교대 근무에 들어갈 시간이라 오늘은 안 되지만 오는 수요일 저녁에는 꼭 나오겠다고 간청하여 이름만 알고 보내었다. 그런데 수요일 기도회에 이어 이양은 나오지 않았고 금요일에 김선영 자매가 뛰어와 급보를 알리었다.
그 내용은 전셋집 주인이 3일 만에 이상히 여겨 안으로 잠긴 문을 박차고 들어가 보니 이 양이 활활 타는 연탄 두 개를 방안에 놓고 연탄가스에 질식사해서 송장냄새가 지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긴 유서에 군수기지창고의 군인과 제대할 때까지 임시 계약으로 동거했는데, 그가 제대한 것을 숨기고 도망갔기 때문에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유가족과 교인들과 함께 이 양의 장례를 잘 치러주었다. 이 사건은 내가 군에 있을 때 자살 미수의 김익심양 사건 못지않은 전도의 시급성에 대한 사건으로 큰 충격이 되었다. 그
날 공장에 조금 늦게 가더라도 상담해 예수님을 영접시켰더라면 자살도 않고 새 생명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 양의 죽음은 바로 내가 잘못해서 죽게 한 일종의 자살방조죄로 여겨져 통렬하게 느껴졌고, 그 후 목회에서 새신자에 대한 관심과 태도가 달라지게 되었다.
그 당시 같은 부대군인으로 윤군도 공장 처녀 김양과 동거생활 하다가 제대를 하고 도망갈 참이었다. 눈치를 알아차린 김 자매는 얌전하고 너무 착했으나 그래도 신앙심이 있어 망설이다가 나에게 털어놓았다. 윤군이 아기를 떼고 헤어지자고 위협하고 있어 죽겠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이 양의 충격이 남아있는데 윤 군을 불러 엄중히 책망한 후 윤 군의 고향 수원에 예수 믿는 부모에게 연락하여 임신 중인 처녀에게 그렇게 하면 큰 저주를 받는다고 권고했다.
부모가 내려와 상담을 한 후 잘 살도록 타일렀으나 내키지 않았던 가정생활은 윤군의 방종으로 엉망이었다.
제대 후 운전을 하다가 부산 북부 경찰서에 투옥되었을 때 나는 출감도 잘 도와주었고 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윤요한’이라고 지어 주기도 했다. 하루는 잘 사는가 싶어서 심방을 하니 윤 군은 운전해서 번 돈으로 매일 사우나를 하고 술도 먹고 들어오면서 아내를 두들겨 패고 밥상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생활비가 적어 아기에게 우유를 묽게 타서 달라는 대로 자꾸 많이 먹었더니 배가 톡 튀어나와 이상하다는 것이다. 시골교회에 있을 때 경험으로 “짜구”가 나면 그런 것을 알고 돈을 주어 긴급처방을 했다.
하지만 30년이 흘러 윤군의 전화를 받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한다니 매우 기뻤다. 아들 요한이는 미국 오클라호마(Oklahoma) 주립대학원에 입학하여 공부를 잘 하고 있고 김 자매는 경기도 화성 시청 앞에서 식당을 하고 있는데, 가끔 목사님 생각이 나고 너무 뵙고 대접하고 싶어서 이곳저곳으로 수소문해 이렇게 전화를 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50년 목회생활에 많은 얘깃거리가 있지만 영혼구령으로 변화된 개인이나 가정 및 저들의 축복의 소식은 적잖은 위로와 보람으로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된다.
시편기자는 “인생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 했으니 남은 여생이 석양의 그늘에 들어가고 있다. 하루가 귀하고 석양을 넘길 때가 아깝다. 목양자로서 복음 전도인으로 최선을 다해 죽도록 충성을 다짐해본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의 무리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음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의 무리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겔34:8~9)
/ 한명국 목사 BWA전 부총재 예사랑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