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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와 우리말

현재 우리 사회에서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직업을 꼽으라면 교사, 아나운서 등과 함께 목회자가 꼽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말을 많이 하는 만큼 그들의 말의 영향력 또한 클 것이다. 아나운서는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고, 교사는 듣는 사람 수는 아나운서보다 적어도 보다 긴 시간 동안 학생들이 배워할 내용을 말하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는 청중이 신자라는 제한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설교를 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가장 무게 있게 받아들일 것이다. 때문에 목회자의 말의 영향력은 폭은 좁으나 깊이는 가장 깊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의 목회자는 국어인 한국어로 설교를 한다. 그런데 한국어는 순우리말과 한자어 그리고 외래어로 구성된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본래 모든 언어는 사회적 문화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사회가 변하고 문화가 변하면 언어도 변화한다. 산업화 정보화 사회에서 더 이상 농업사회의 언어만으로는 소통할 수 없다. 말은 필요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필요가 사라지면 소멸하기도 한다.


또 말은 사용될 때 생명이 있는 것이므로 어떤 이유에서든지 표준말이 아닌 말도 절대 다수가 사용된다고 여겨지면 표준말이 되고 문법에 맞지 않던 말도 괜찮게 된다, 짜장면의 표준말은 자장면이었는데 짜장면을 대중들이 계속 사용하니 짜장면도 표준말이 되었고, ‘너무 나쁘다’ ‘너무 아프다’ 등과 같이 부정적인 의미를 수식하던 ‘너무’를 ‘너무 좋다’처럼 아무데나 다 쓰니 방송 등을 통해 말리다가 결국 맞는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한국어는 긴 역사 속에서 순우리말과 한자어가 병존해왔다. 우리 고유 문자가 없었기에 이두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한자는 권력을 가진 지식층의 전유물이었기에 다수인 일반 백성이 사용하던 순우리말은 언제나 열등하게 여겨졌다. 이는 한글창제에도 불구하고 크게 달라지지 않다가 근대에 이르러 한글 사용이 보편화 되면서 조금 힘을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 치하에서 신문물과 함께 마구 유입된 일본식 한자어와 순우리말로 불리던 지역 명을 일제가 행정체계를 자신들 방식으로 바꾸면서 한자화함으로써 순우리말은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정보화와 세계화 흐름 속에서 영어는 엄청난 속도로 한국어에 파고들고 있다.


이런 외래어는 현실적으로 피하기 어려운 측면도 분명 가지고 있다. 순우리말에 없는 단어는 북한처럼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북한도 일부는 새로 만들지 않고 외래어로 쓴다.) 그냥 음가만 따서 표기하는 것이 덜 복잡하고 편리할 수 있다. 영어의 보급률을 생각할 때 영어를 한자말로 번역해 한글로 표기하는 것이나 영어를 그냥 한글로 표기하는 것이 뭐가 다르냐는 주장도 있다. 여하튼 우리말은 이런저런 이유들로 점점 더 홀대를 받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글 전용을 찬성하는 쪽이지만 순우리말 전용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기에 누구도 주장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도 없다.


언젠가 유명한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분은 설교 중에 아주 영어를 빈번히 사용했다. 물론 영어를 쓰는 게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설교 내용의 정확하고 풍성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분은 외래어라기보다는 외국어를 우리말과 마구 섞어 쓰는 것이었다. “여러분 해피하십니까?”처럼 말이다. 이미 우리말이 있는데 그리고 한자말이라도 긴 역사 속에서 우리말이 된 말이 있는데 별 의미 없이 외국어를 남발하는 것은 공감하기 어려웠다. 외국에서 들어온 지도 몇 십 년이 되었고 외국에 살다온 것을 자랑하거나 영어 잘하는 것을 과시하려는 것은 아닐 텐데 짐작컨대 그 분은 그냥 별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영어를 쓴다고 해서 하나님 말씀을 잘못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알기로 그 분은 꽤 유명한 설교자다.


부교역자 시절과 군목 시절에 몇몇 유명한 대학생 선교단체 출신들과 함께 한 경험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대표기도를 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가 어느 단체 출신인지 알 수 있었다. 단체별로 공통적이 말버릇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의 지도자가 그럴 것이라고 짐작했다. 조 용기 목사님의 ‘ㅅ’발음을 그 교단의 많은 후배목사들이 따라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목회자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그 말은 성도들에게 영향력이 크다. 그런데 그 영향력은 내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하더라도 목회자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나 말버릇은 알게 모르게 성도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또한 우리말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물론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한다고 해서 좋은 목회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훌륭한 설교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신앙의 선배들이 하나님 말씀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였긴 하지만 한글을 보급하고 가르치는 일에 큰 공헌을 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목회자들이 우리말을 바르게 사용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행하는 것은 비록 목회 사역의 본질은 아닐지라도 한국 기독교에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편협한 민족주의니 영어조기교육의 열풍이 불고 있는 마당에 시대에 뒤떨어진 소리를 하고 있다느니 하며 나무라는 사람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인이며 한국어로 설교하는 사람으로서 좀 더 우리말을 아끼고 사랑하며 바르게 사용하자는 말에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 고성우 목사  반조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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