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에 독일 라이프찌히에서 개최된 유럽지역 선교사대회에 참석하는 동안 모라비안 교도들의 유적지 헤른후트(Herrnhut)를 방문해서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는 모라비안 교회와 수 백기에 이르는 신도들의 묘역을 탐방할 기회를 가졌다.
모라비안 운동의 지도자 진젠도르프(Nikolaus L. von Zinzendorf, 1700-60)는 작센 지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신앙심이 돈독했던 외조모 헨리에타(Henriette Gersdorf)에게 경건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열 살 때 할레대학(Univ. of Halle)에 입학해서, 후에 스페너(Philipp J. Spener, 1635-1705)의 뒤를 이어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선구자가 된 프랑케(August H. Franke, 1663-1727)와 우정을 쌓았고, 재학 중에는 다섯 명의 친구들이 “겨자씨 모임”(The Order of the Grain of Mustard)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신앙상담을 하며 선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젊은 귀족 진젠도르프는 1719년, 유럽 여행 중에 뒤셀도르프에서 “내 너를 위여 몸 주건만 너 나를 위해 무엇 주느냐”라는 각명(刻銘)이 붙은 도메니코 페티(Domenico Feti)의 <Ecce Homo>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는 십자가상의 예수 그림을 보고 크게 감동 받았고, 그 감동은 일생동안 그를 사로잡아 작위(爵位)와 변호사직을 버리고 경건운동과 선교에 전념하게 했다.
모라비안 운동
진젠도르프를 중심한 경건주의 개혁운동이 “모라비안운동”으로 불리어진 것은 이 운동이 보헤미아, 즉 옛 체코슬로바키아의 행정구역의 하나인 모라비아(Moravia)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 살던 후스파 개신교도들은 로마교회와 보헤미아 국가교회로부터의 박해를 견디다 못해 그곳을 떠나 진젠도르프의 영지(領地)인 독일 동북부 드레스덴 지역의 헤른후트(Hernhut)로 이주했다.
진젠도르프는 1727년에 루터교 감독시험에 합격한 후 변호사직을 버리고 목사로 안수 받고 28년 동안 소위 “모라비안운동”으로 알려진 경건운동을 이끌며 한 생애를 바쳤다.
모라비안 교회
현재 헤른후트에 남아 있는 모라비안 교회는 창고처럼 지어진 소박한 단층 건물로써 예배실 안에는 어떤 장식이나 십자가도 성수대도 없고 강대상 하나와 긴 나무 의자들뿐이었다. 당시의 교회가 미사제사에 적합하도록 위엄을 세워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진 반면에 모라비안 교회는 말씀 중심 회중 중심의 검소한 교회당으로 지어졌다. 루터나 칼뱅 같은 개혁자들도 당대에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가톨릭교회의 권위적이며 성례 중심적 교회당 구조를 모라비안 교도들은 어떻게 단번에 개혁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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