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교 단체가 복음전파를 소홀히 여기며, 어떤 선교사가 복음을 위해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랴만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도들의 경건하고 헌신적인 삶과 희생적 선교는 비교할 데가 없다. 이 공동체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도와 선교에 대한 열정이었던 것 같다.
1. 기도
1722년 90명의 신도들이 모라비아를 떠나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진젠도르프의 영지(領地)인 헤른후트로 이주해서 정착했고, 4년 후인 1726년에는 그 수가 300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1727년부터 24명으로 구성된 기도 모임(들)을 만들어서 남여 두 사람이 짝을 지어 자정부터 한 팀이 한 시간씩 24 시간 연도(連禱)를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이 기도가 그로부터 백년 이상 지속됐으며, 기도를 시작한 때로부터 2백년 동안 모든 대륙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위업을 달성했다는 사실이다.
2. 선교
모라비안 교회는 1732년에 서인도제도에 선교사를 파송한 것을 시작으로 1735년에는 그린란드와 수리남, 1737년에는 아프리카, 1740년에는 아메리카 인디언과 실론, 1742년에는 중국, 1747년에는 페르시아, 1754년에는 자메이카, 1756년에는 안티구아(Antigua)에까지 선교사를 파송했다.
1760년 진젠도르프가 죽기까지 28년 동안 모라비안 교회는 226명의 선교사를 배출했고, 그 해까지 그린란드의 13개 지역과 중, 북부 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에서 66명의 신도들이 선교사의 신분으로 6,125명의 새 신자를 양육했다.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의 이와 같은 선교는 독일 개신교에서 최초로 일어난 자발적 선교운동이었다.
이 선교운동은, 피선교지에 세워진 교회를 통해 선교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어서 이때 이후로 피선교지 교회들도 선교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선교전략을 세우게 되됐다. 진젠도르프 사후에도 모라비안 공동체는 서인도제도에서 2백년에 걸쳐 3천명의 선교사를 지원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고, 해외 선교지의 신자 수가 내지 교회 신자의 3배나 되는 놀라운 성과를 보여줬다.
모라비안들은 해외 선교 뿐 아니라 국내 선교와 개척자로서 지역개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영국교회의 대주교 겸 작가였던 로날드 녹스(Ronald Knox, 1888-1957)는 모라비안 운동을, 유럽 선교에 활력을 불어넣은 “누룩”이라고 했고, 하세(Hasse) 주교는 모라비안의 영향은 “초기 영국교회 부흥의 중요 요인 중 하나”라고 평가 했다. 작은 모라비안 공동체의 기도운동과 복음에 대한 열정이 온 세계 교회에 선교의 불을 지폈다(Kcm.kr/d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