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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본 갈라디아서의 구원론-7

중세의 스콜라 신학의 실재론은 보편개념의 강조를 가져오고 개체의 종속성은 교황중심체제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당했다. 플라톤적인 신학체계에서는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더 우월하기에 제후나 황제보다도 주교나 교황이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또한 스콜라 신학은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는 특징이 있기에 하나님의 존재와 말씀을 의심하는 부작용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로 행동을 선택할 수 있고 선행을 하여 공덕을 쌓아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함으로 오히려 인간을 율법 아래 매이게 하고 인간의 공덕을 통한 구원의식을 가지도록 조장했다.

결국 이러한 중세의 가톨릭의 구원론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를 배제시킨 비성경적인 인본주의 구원론으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교황을 앉히고 성령님을 마리아로 대체시킨 사탄적인 바벨론 종교집단으로 전락하게 됨으로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게 했다.


가톨릭의 구원관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나오 는 공로(합일치공로, 신인협력설 채택)교리와 오직 성서만으로의 신앙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칭의를 받으려면 믿음과 함께 선행이 필수적이며 이 믿음과 선행이 구원의 본질이라고 선언했을 때 이미 가톨릭은 개신교와 화합할 수 없는 길을 걷게 되었다.

루터는 이러한 가톨릭의 인간의 행위로 인한 이행득의(以行得義)와 인간의 협력을 거부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주장했다.


이와 같은 루터의 칭의론은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해서 스콜라주의에서 완성된 가톨릭 신학적 세계관에 강력하게 대립함으로 제기됐다. 중세 스콜라신학의 시작을 알렸던 어거스틴은 구원론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참여를 함께 강조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이후 스콜라신학자들이 공로의 가르침을 쌓아가는 기초를 놓게 됐다. 최고의 스콜라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 공로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구원의 과정은 은혜의 주입을 통해 신앙을 갖게 됨으로써 시작되지만 그 후에는 인간의 공로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루터는 어거스틴 신학의 양면성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는 수용하되,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부분은 거부했다. 또한 믿음만이 구원의 조건임을 강조하여 아퀴나스의 인간 공로의 필요성을 부인했다.

이와 같이 루터는 가톨릭의 구원론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오직 믿음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무능력과 전적타락, 인간의 죄의 노예성을 강조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출발은 인간이 어떻게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인간 이해로부터 출발했다. 이러한 루터의 이신칭의교리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를 분리하는 근본 원인이 됐다. 종교개혁 이후, ‘이신칭의의 교리가 기독교사상의 핵심교리로 받아들여져 왔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갈라디아서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기도 했다. 특히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3:21-22, 24, 26, 28; 4:3, 5; 5:1, 9; 2:16; 3:11; 2:8; 3:7)는 바울의 이신칭의가르침을 바울 복음의 핵심은 물론, 기독교 구원교리의 근간(根幹)으로 간주했다.


루터는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 서론에서 만일 (이신)칭의 교리가 상실되면, 모든 참된 기독교 교리가 상실된다고 주장함으로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은 이신칭의의 관점에서 이해됐다. 이와 같이 칭의 항목(Articulus justification)을 다른 모든 것이 종속되는 복음의 그 말씀으로 본 것은 루터 자신이었다. 그가 주창한 칭의교리는 그로 하여금 교황제도와 당시의 교회를 거부하게 만들었다. 이는 당시의 가톨릭교회가 믿던 칭의 교리란 다름 아닌 펠라기우스주의라는 루터의 확신에 의한 것이었다. 루터는 만약 교황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에 대한 대가 없는 칭의를 인정한다면, 교황의 권위에 순복하겠다는 취지로 말했다.


루터의 신학적 돌파구 및 당대 가톨릭교회와의 연이은 논쟁의 초석은 결코 칭의의 과정을 인간이 시작할 수 없다는 통찰력과 당시 교회가 펠라기우스적 오류에 빠졌다는 그의 확신에서 비롯됐다.

루터의 구원론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는 의인이다. 루터는 의롭게 하다의인이라는 용어를 한 가지 이상의 의미로 사용했다. 의인은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판단과 더불어 다른 한편 인간이 근본적으로 의롭게 되는 모든 사건을 의미했다. , 인간에 대한 의의 전가와 더불어 인간의 실제적인 의로워짐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의인은 지상에서는 불완전하게 남아 있고, 마지막 날에 가서야 비로소 완성된다고 하였다. 이런 의미의 완전한 의는 종말론적 실재다. 루터는 신자는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이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루터에게 있어,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반면 사람들 앞에서의 의인이 아니다. 의롭게 된 죄인은 언제나 죄인이면서 언제나 회개하는 자이자, 지금 인간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루터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그의 전 생애동안 죄인으로 남아 있으나, 의인된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된 죄인이다.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의로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고 강조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언적 행위로 인해 의롭게 된다는 칭의론을 주장했다. 전자는 밖으로부터 온 의’(alien righteousness), 후자는 믿는 자(칭의 받는 자) 자신의 실제적인 이다.


루터에게 있어서는 로마 가톨릭 구원론과는 달리 믿음과 순종, 나아가서 성화의 과정이 구원이 아니라, 복음을 은혜와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제로 의롭지 않으나 이신칭의를 얻는 것이 구원이라 했다.

이와 같이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를 밖에서부터 스며들어온 외래적인 곧 그리스도의 와 그리스도에 의하여 가능하게 된 곧 믿은 신자들의 로 구분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를 통해 인간을 의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가 신자들의 가 되며 그리스도가 가진 모든 것이 신자들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이기에 그리스도가 가진 것과 똑같은 를 가진 자라고 했다.

루터는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에서 다음과 같이 이신칭의를 정의한다. 이 신앙고백 제4항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공로들, 선행들, 만족케 하는 일들에 의해서 하나님 존전에서 죄의 용서와 를 얻을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죄사함과 의와 영생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음으로써 은혜로 하나님의 존전에서 사죄함을 받고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신앙을 의로 여기시는 것이다.


2)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

기독교 역사학자들은 종교개혁의 기초는 마르틴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였다고 말했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갈라디아서는 나의 서신이다. 말하자면, 나는 갈라디아서와 결혼했다. 갈라디아서는 나의 캐서린(Katherine, 루터의 아내)이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갈라디아서는 나의 캐서린처럼 나의 분신이며 소중한 가치를 지닌 서신이라는 것이다. 이 갈라디아서의 강해를 통하여 루터는 가톨릭의 행위에 의한 구원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이러한 반대에서 루터는 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한 구원을 선포했는데, 이것은 갈라디아서를 세심하게 연구한 결과였다.


루터는 갈라디아서의 첫 주석을 1516~17년 겨울에 95개조 반박문을 써 붙이기 전에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갈라디아서를 강의한 것을 정리해 1519년에 출판했다. 루터는 1531년에 다시 한 번 강의하였고, 이 강의 내용을 1535년에 주석 책으로 출판했다. 1519년에 강의한 갈라디아서 주석보다 1531년의 것이 바울사상에 대한 성숙한 루터 신학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로마가톨릭 진영과 협상이 결렬된 후 개신교 제후들이 그들의 옛 동맹정책을 부활시키고 있었던 긴장된 상황에서 루터는 오직 은혜와 믿음을 통한 칭의라는 종교개혁의 핵심 진리를 변호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는 상황 속에서 루터가 강의한 내용을 뢰러(G. ROrer)가 개정해 1535년에 출판했는데 이를 () 갈라디아서 주석이라 한다.

김종이 목사 / 성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