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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능력

 

요한계시록에는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3:8)라고 하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한 칭찬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적은 능력이란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이 말씀이 쓰인 시대를 포함한 모든 배경부터 이해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1:1)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계시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당신의 뜻을 나타내 보이시는 행위와 그 내용을 말한다. 그런데 이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통하여 사도 요한에게 전달 된 것을 그가 다시 믿는 사람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사도 요한이라는 말인데, 그가 복음으로 인하여 지중해 연안의 밧모라고 하는 이름의 섬에 유배되었을 때 쓴 것이다. 성경은 어느 것 하나 성령의 감동에 의해 쓰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기록한 사람 각자의 삶에 따른 다양한 배경과 집필동기 등에 따른 기운이 짙게 서려 있다.

 

요한계시록도 성령의 감동이라는 면에서 보면 다른 성경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내용에 기록자의 견해가 배제됐다고 하는 면에서 보면 많이 다르다. 이는 예수께서 직접적으로 보여 주시고 그대로 기록하라 하신 명령에 따라 쓰인 말씀(啓示)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일부 예언서들에도 이와 같은 직접성이 다소라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한계시록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한다. 요한계시록의 본론 부분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와 말세의 대환란이 그것이다. 모두의 적은 능력운운한 말씀은 이 일곱 교회 가운데의 하나인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중의 일절이다.

 

여기에서의 일곱 교회는 요한계시록에 지칭되어 있는 일곱 개의 교회들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의 일곱은 완전수이므로 장소와 세대를 초월한 모든 교회들을 의미한다. 환언하면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모든 교회, 즉 믿는 우리 모두에게 보내 온 것이다. 그렇다면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그분의 이름을 배반치 않도록 한 적은 능력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25:14~30)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주리”(25:23)라고 하신 말씀의 그 작은 일을 하도록 한 적은 달란트가 바로 적은 능력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이나 은사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또 신분이나 지위가 보잘 것 없고 물질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도 의미한다.

 

빌라델비아는 직물과 피혁 공업이 잘 발달되어 있는데다가 양질의 포도주가 다량으로 생산되어 상업까지 발달된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러니 자연히 사람들의 왕래가 많고 경제적으로도 부요한 도시가 되었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문란한 것은 물론 우상숭배까지 심했다.

 

그러다 보니 빌라델비아 교회의 교인들이 겪어야 할 어려움은 작은 것이 아니었다. 경제나 사회적 주도권은 교인들이 아니라 도시에 만연되어 있는 우상숭배자들이 쥐고 있었으므로 이들과 어울려 한통속이 되지 않으면 갖은 어려움을 다 겪어야 했다. 경제적인 불이익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따돌림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우상숭배자들은 질펀하게 벌인 술판이 끝나면 이어 성의 향연을 펼쳤고, 이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은 따돌려 괴롭혔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의 생활은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거룩한 빈곤인 셈이다. ‘적은 능력의 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정말로 적은 능력일까? 아니다. 필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그분의 이름을 배반치 않도록 하는 것이라면, 그것도 어려운 여건에서 그리하도록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적은 능력이 아니라 큰 능력임에 틀림없다. 그보다 더 큰 능력은 없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믿음으로 하는 일상생활만큼 큰 하나님의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고 회개시키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큰일이 되지 못한다. 큰일이 아니라 작은 일 중의 작은 일도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하나님의 방법인가. 그야 물론 성경이 가르치는 방법이다. 그리고 성경은 모든 일을 바르게 하라고 가르친다.

 

필자는 얼마 전 한 일간지에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어느 초대형교회의 원로목사님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읽고 입맛이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원로목사님께서는 교회의 사유화와 교회의 재정비리, 아들의 병역비리 등의 의혹을 불러일으켜 사회의 지탄을 받는 분이기 때문이다.

 

한기총은 추천 이유를 지구를 115바퀴나 돌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복음을 전한 분라고 밝혔다고 한다. 실적 면에서 보면 대단한 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대단한 일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교회의 사유화나 재정비리 같은 잡음을 일어나지 않게 했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의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같은 부도덕한 일은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불신자들도 저지르지 않는다.

 

현대 기독교의 오류는 물량과 성과 위주의 성장에 신앙상의 방점을 찍고 있다는 데에 있다. 필자는 이런 현상에 접할 때마다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잡히시던 자리에서 제자 중 하나가 잡으려던 자의 귀를 칼로 쳐 떨어뜨리자 그분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 말씀은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였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할 수 없어 당신의 자녀인 우리에게 일을 맡기신 것이 아니다. 부자라 해서 자식들을 놀고먹게 한다면 자식을 버려놓고 마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그러기에 일을 시킨 자식이 불법과 편법으로 사업을 하여 돈을 번다면 그 자식은 범죄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범죄자는 국가나 사회에 없는 것이 더 낫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며 그분의 방법에 따라 하지 않는다면 아니함만 못하다.

거듭 말하지만 믿음으로 하는 일상생활만큼 큰 하나님의 일은 없다. 생활은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게 하면서, 다시 말해 바르지 못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큰일을 하겠다며 동분서주하는 것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일을 할 수 없으셔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일을 하라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정말이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훈련을 받아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훌륭하게 성장하게 하기 위해 일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도 일에 매몰되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의 바른 길(方法)을 망각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 모두에게 큰일을 하라고 하시지는 않는다. 남과 구별된 특별한 일을 하라고도 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라는 것만은 믿는 사람 모두에게 사명으로 주셨다. 믿음으로 사는 것, 그것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게 한 작은 능력이다. 작아 보이지만 가장 큰 능력이다.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것은 모양이야 하나님의 일이지만 실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이는 사데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 교회를 책망한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3:1)라고 한 말씀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예수께서 율법의 형식에 매몰되어 그것이 바라는 바를 오히려 거스른 유대의 교권주의자들을 심하게 책망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그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지금의 우리야 말로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하는 말씀의 참의미를 되새김질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임종석 목사

우리집교회 협동목사

충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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