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더스는 더 나아가 갈라디아서의 중심 주제는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구원론이 아니고 오히려 이방인들이 어떻게 언약 관계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 문제로 봤다. 루터는 ‘의로움’을 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무죄의 선언으로 이해했지만 샌더스는 갈라디아서 3:28을 예로 들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한 인격이 되었다고 본다. 즉 샌더스는 갈라디아서에서 제시된 바울의 칭의 교리는 이방인이 어떤 조건으로 언약백성에 참여하는가를 둘러싼 논쟁 가운데서 출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무너뜨린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장벽을 다시 세우는 것 때문이라고 했다.
샌더스는 바울의 진술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심판 날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죄인이 믿음으로 언약 공동체에 소속되고 율법에 따라 의롭게 삶으로 궁극적으로 종말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샌더스는 ‘율법의 행위’란 할례, 음식법, 절기법을 준수하는 행위들을 지칭한 것으로 본다. 이것은 바울 당시에 유대교의 정체성이 되어 왔고 갈라디아교회의 유대주의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할례나 모세 율법의 준수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샌더스가 제2성전시대에 유대교 문헌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것과는 달리 던과 라이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집중 연구해 바울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발표했다. 던은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받아들이고 바울 당시의 유대 사회와 바울서신에 대한 긴밀한 읽기를 통해 당시 유대 사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정체성의 표지로서 세 가지 율법의 행함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할례, 음식법, 안식일 준수라는 아이덴티티 마커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눠 버림으로써 바울의 복음을 대적해 왔기에 바울은 격렬하게 반대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이 비판하는 ‘율법의 행’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겠다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던 신분 표지로서의 율법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던은 갈라디아서 3:10~14에서 바울이 표명하는 율법주의에 대한 경계, 즉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유대인들은 독특한 민족적, 종교적 표지로 작용해 십자가 사건을 통해 마련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동등성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구원관과 관련해 ‘율법주의’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던이 보기에는 바울이 그토록 흥분하며 반대했던 것은 유대교 율법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아이덴티티 마커로 생각하는 ‘율법의 행위’를 비판했다는 것이다. 던이 강조하고자 한 것은 유대교 율법주의가 아니라 유대 민족의 우월주의 또는 배타주의에 대한 바울의 적대감이 바울을 반 율법주의로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얻는 의에 대해 말하면서 ‘율법의 행위’를 통렬히 비판했다. 던이 그의 바울신학의 닻을 힘차게 내린 지점이 바로 루터가 발견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게 했던 갈라디아서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던은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수용함으로 루터와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던은 루터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잘못 이해했다고 비판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 이해하여 양심에 평안함이 없었는데 이는 중세교회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이라 했다. 던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구약으로부터 직접 도출된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자비하심을 행위로 이해했다고 보면서 심판의 용어가 아니라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의무를 지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종이 목사 / 성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