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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 종교개혁의 두 주류는, 알다시피 제네바의 칼뱅과 취리히의 츠빙글리이다. 츠빙글리는 대학을 나온 청년들을 모아서 “예언모임”을 만들어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미사제사, 성인숭배, 면죄부 판매, 고해성사, 연옥교리, 및 비성서적 교황제도 등 67개 조의 개혁과제를 토론하면서 로마가톨릭교회와 맞서 개혁을 이끌었다. 이 “예언모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콘라드 그레벨, 펠릭스 만쯔, 게오르게 불라우락 등이었으며 이 모임은 후에 ‘스위스 형제단’으로 발전해서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모체가 됐다. 그런데, 츠빙글리가 아나뱁티스트의 국가관을 비판한 것으로 보아 그 당시에 이미 ‘아나뱁티스트’로 불리는 다른 종교집단들이 있었던 것 같다.
츠빙글리는 ‘신자의 뱁티즘’을 주장한 그의 제자들과는 달리 유아세례를 지지했고 1525년 1월 17일부터 시작된 제3차 신학 공개토론회에서는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오직 신자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한 제자들을 심하게 꾸짖기까지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츠빙글리와 ‘스위스 형제단’은 결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1월 21일 밤에 ‘스위스 형제단’ 회원들이 펠릭스 만쯔의 집에 모였을 때 가톨릭교회 신부 게오르게 불라우락(George Blaurock)이 그레벨에게 신앙고백에 근거한 신자의 세례를 받고 싶다고 하자 그레벨이 그 자리에서 뱁티즘을 베풀었다. 뱁티즘의 형식은 세례(洗禮, aspersion)였다.
그레벨은 며칠 후에는 12명의 신도들에게 관수례(灌水禮, affusion)를 베풀었으며, 또한 그가 여행 중에 만나서 전도한 볼프강 울리만(Wolfgang Ulimann)에게는 부근의 라인강에서 침수례(浸水禮, immersion)를 베풀기도 했다.
그레벨과 ‘스위스 형제단’은 ‘신자의 뱁티즘’을 주장했지 뱁티즘의 형식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베푼 뱁티즘의 형식은 분수례, 관수례, 침수례 등으로 다양했다.
그레벨과 ‘스위스 형제단’이 ‘재세례파’로 불리어진 것은 그들이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다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이었다. 아나뱁티스트들이 역사적으로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개신교회로부터도 박해를 받은 것은, 입회자들에게 무조건 재 세례를 베풀고 국방과 조세의 의무를 거부하고 공동체 생활을 강요한 반사회적 공동체 운동으로 잘못 알려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심지어 아나뱁티스트들은, 1534년에 일어난 전대미문의 반사회적 종교폭력시위인 ‘뮌스터 폭동’을 주도한 얀 맛디스와 얀 반 라이덴 같은 광신적 무정부주의자들과 같은 무리로 오해 받기도 했다. ‘신자의 뱁티즘’을 베풀어 온 침례교회도 역사적으로 많은 박해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참고문헌 중 최근의 것으로는 김승진의 “종교개혁가들과 개혁의 현장들”(나침반, 2015)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