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선교의 양 날개

‘도한호 목사의 목회와 상식’- 137

우리나라에 개신교 선교사가 처음 입국한 것은, 알다시피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916d.)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902d.)이다. 그러나 역사는, 개신교 선교의 효시를 독일인 선교사 귀츨라프(Karl F. A. Gutzlaff)가 미국 상선 암허스트 호에 승선해서 배가 충청도 홍주만 고대도에 잠시 기항한 동안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한 1832년과 영국인 선교사 토머스(R. J. Thomas)가 제너럴셔먼호에 승선했다가 성경 한 권을 남기고 평양성 부근 대동강 변에서 순교한 18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뿐만 아니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오기 1년 전에 의료 선교사로 입국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알렌(H. N. Allen)이 명성왕후의 친정 조카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하고 고종황제의 어의(御醫)가 됐던 것도 조선선교의 효시 중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젊은 선교사들은 한국에 오던 해부터 인재 육성 계획을 실행에 옮겼으니, 아펜젤러는 첫 해에 학생을 모아 가르치면서 한글 장려운동을 시작해서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 받았고, 언더우드는 제중원(濟衆院)을 중심으로 세브란스 병원을 세우고, 병원을 토대로 연희전문학교를 세우는 한편 YMCA를 조직해서 청년운동을 이끌었고, 미국 북감리교의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 1922d.) 선교사의 아내 메리는 1886년에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梨花學堂)을 세우고 명성황후로부터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받았다.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세운 교육기관은 1886년 경신학교에 이어 정신여학교, 영화여학교, 숭덕, 숭실, 정의, 일신, 배화, 숭의, 호수돈, 보성학교 등등 일일이 기록할 수도 없이 많다.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1910년까지 설립된 기독교계 학교의 교파별 통계는 장로교 501개교, 감리교 158개교, 성공회(聖公會) 4개교, 안식일교 2개교, 천주교 46개교이다. 종파 미상 학교 84개를 포함해서 신·구교가 세운 학교는 모두 796개교나 된다. 침례교 선교는 개신교 선교에 불과 4년 늦은 1889년에 펜윅(Malcolm C. Fenwick, 1935d.) 선교사에 의해 시작됐지만 교육기관은 세우지 않았다.


침례교단의 현실은, 6·25 전쟁 직후 재한 미남침례회선교부가 부산에 세운 침례병원은 부도에 직면했고, 법인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교육당국과 유관 지방자치단체의 인·허가까지 받은 수도권 제2캠퍼스 설립계획은 이유 없이 무산됐다. 교육과 의료는 선교의 양 날개와 같을진대.

교단 지도자들의, 필자를 포함해서, 이기심과 무사안일주의가 빚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대형사고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꾸짖지 않으실까 염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