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전국사모회 제12차 총회와 교육수련회가 6월 3~5일 부산 해운대 글로리 콘도에서 열려 폐회설교 부탁을 받고 처음으로 동참하게 됐는데 200여명 넘는 사모님들이 참석했다. 돌이켜보니 2년전 총회 주소록을 받고 교단 전체교세가 없어 주소록에서 대충 헤아려봤더니 115지방회의 4810교회에 목회자 수는 6226명으로 기억됐는데 따져보니 평균 30:1 비율로 200여명이 참석했었다. 듣자니 지난번 교단 홀사모 위로회는 40여명 중에 30여명이 참석했다고 들었는데, 이번 사모회는 좋은 강사진과 알찬 진행으로 영적 은혜를 많이 받은 집회에 소수로 모여 아쉬움이 남는다는 참석자들의 얘기를 들었다. 새로운 집행부는 명년에도 갑절로 참석토록 행사위주의 진행보다 열매맺는 영적 집회가 되도록 더욱 잘 준비하기를 기대해 본다. 엄부자모란 말이 있는데 아버지는 엄중하고 어머니는 자애롭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모님은 사모님(師母任)? 사모(事母)님? 사(思)모님? 무슨 뜻인지? 목사의 어머님, 스승 같은 어머님? 일하는 어머님? 사모하는 어머니란 뜻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어떤 사모는 목사가 설교를 길게 하면 뒷쪽에 앉았다가 일어나서 손으로 X표를 하는가하면 노골적으로 설교가 뭐
율법의 복은 조건부 복이다. “…행하면…” “…순종하면…” 등 사람 편에서 어떤 자세를 취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복을 주사라고 했다. 물론 이말 속에는 “…행하지 않으면…복을 안주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를 쏟아붓는다고 했다(신28장). 이에 비해 복음의 복은 조건이 없다. 조건이 있다면 그 조건은 하나님이 충족시켜 놓은 조건이다(요일 3:16, 요일 4:10).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의 모든 것에 눈을 감으시고 복을 주었다. 눈 감으신 것이 아니라 눈을 뜨셨지만 우리의 초라한 모습을 보지 못하셨으니 곧 우리의 허물과 죄를 간과 하셨다는 것이니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들의 허물과 죄 위에 보혈 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구약 율법이 주는 조건부 복을 나열해 보자. 성읍에서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고(신28:3), 온갖 인생과 짐승의 소생이 복을 받고(신28:4),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신28:5),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신28:6), 적이 한길로 침입했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혼줄나게 쫓겨 가고(신28:7), 꾸어 줄지언정 주지 않고(신28:12), 남의 머리가 될지 언정 꼬리가 안 되고 위에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으면 인격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다. 마음과 생각, 말과 행동은 인격의 사대요소이므로 우리는 십자가로 심사언행(心思言行)을 삼간 후 예수의 부활로 새로운 인격의 변화로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의 위대한 신앙과 선교의 계기가 되길 소망한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여기서 사람은 무엇보다 첫째로 마음을 지켜야 한다. 사람은 마음의 바탕에서 생각이 떠오르며 생각에서 말이 나오고 말한 대로 행동하게 되므로 “심사언행”이라 본다. 하와가 마귀의 유혹으로 금단의 열매 선악과를 쳐다보니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마음에 먹고 싶은 생각대로 따먹고 아담도 함께 범죄케 했다. 무엇보다 우선 심령이 변화돼야 한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22:37~38)라고 첫 번째 계명을 말씀하셨고, 바울사도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히3:8)라고 권면했다. 다윗 왕은 궁궐에서 건
기독교한국침례회 원로목사회 위문잔치 모임이 교역자복지회(회장 황인정 목사) 주관으로 지난 4월 말 2박 3일 일정으로 가평 필그림하우스에서 있었다. 연세가 70, 80, 90세가 된 200여 원로목사님 내외분들이 모였다. 모든 프로그램이 부담 없이 휴식처럼 되어 있지만 그래도 한 프로그램만은 예배 중심과 설교자의 말씀 전하는 시간이었다. 마침내 강사가 등단했다. 오시느라고 수고하셨다는 예의 인사와 간단한 자기소개가 끝난 뒤 바로 말씀선포로 직행했다. 주제는 “천로역정에 나타난 기독교 7대 영성”이었다. 그 자리에 참여한 나는 순간 ‘아차’했다. 언제 천국 갈지도 모를 목회 노년의 노 목사 부부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주제를 유인물로 해서 전한다는 것이 노 목사들에게는 부적절한 내용이 아니겠느냐는 나 나름대로의 제법 재치있는 판단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가령 노년까지 살아오시기에 어떤 수고가 있었느냐니 혹은 이젠 노년에 편안히 쉬시고 하늘소망 가지시라고 하면 노 목사 부부에게 어울릴 것 같은데 강의 내용은 딴판이었다. 천로역정 기독교 7대 영성을 유인물에 있는 대로 한 자 한 구도 빠지지 않고 설명해나갔다. 이 강사는 노년 목사라도 복음 선포자로 완주(完走)해야 한
사람은 만물 중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창2:22)라고 말씀하셨다. 천지창조 다음으로 하신 기적은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는 사람의 창조이다. 흙을 주물러서 남자인 아담을 만들고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 하와를 만드셨다. 남녀를 만든 재료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말씀하셨다. 1950년대 러시아에서 생화학자들이 기독교를 박멸하기 위해 엄청난 재원을 들여 인체의 구성요소를 합성하여 사람의 육체 모양은 만들었으나 살려낼 수는 없어 생명은 연소(燃燒)에 있다고 믿고 불꽃 속에 있는 생명을 코로 불어넣으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많은 재원만 낭비하고 결국 실패했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a living soul, 生靈, 창2:7)이 됐다. 2004년 12월 6일 타임지에서 ‘우주의 수수께끼’(Cosmic Conundrum)라는
인생은 어머니의 모태에서 존재하기 시작했으나 그 인생의 시발은 모태로부터의 탈출이다. 10개월이 아닌 장장 3년을 어머니 모태에만 남아서 살겠다 하면서 거기서부터 탈출하려 하지 않은 고집쟁이 인생이라면 어떨까. 그런 고집쟁이는 아무도 없다. 모태로부터의 탈출이란 의학적으로는 출산이다. 어머니는 출산하였고 아이는 출생했다. 탈출은 못 있을 곳이기에 그곳을 피해 도망치는 것을 말한다. 가령 지옥으로부터의 탈출은 말이 되지만 천국으로부터의 탈출은 말이 안 된다. 인간의 삶이란 탈출해야만 하는 땅에서 시작된다. 존재는 한 시점의 사건이지만 존재의 양태는 언제나 탈출이다. 탈출은 이동을 말한다. 인간은 식물적 존재가 아니라 동물적 존재이니 그 자리에 박힌 것이 아니라 맨 날 움직이는 존재다. 탈출은 발전을 향한 발 뛰어 놓음이지만 탈선과는 다르다. 탈선은 어느 시점이든 정상에서 벗어남이요 정상의 부정(不定)이요 파괴다. 출생한 영아는 태아(胎兒)의 자리에서 탈선한 것이 아니라 탈출한 것이고 배 속에서 세상 밖으로의 이동이다. 다 자란 청년이 되어서는 부모의 품안에서부터의 탈출을 시도해야 한다. 인간은 캥거루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은 부모로부터 탈출을 결혼이라고
“최재선 전도사, 지난 주일 나는 느티나무 밑 숲길로 도안교회에 오르다가 독뱀에게 물려 뱀독으로 오른쪽 발이 너무 퉁퉁 부어 올라 걷기가 힘드니 내 대신 가서 수요일 예배를 인도해 주시요!”라고 했더니 당시 나도 사례 없이 봉사하므로 다른 신학생들은 몇 사람 모두 거절했다. 하지만 최 전도사는 계룡버스로 유성에 가서 걸어서 십리길로 도안교회에 잘 다녀와서 나는 고마움을 기억해왔는데, 1971년 9월 초에 부산 남문교회 개척 목회시 최 전도사가 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모님을 수소문해 선교사 우기수 침례병원 원장에 잘 부탁하여 취직시켜준 일이 이었다. 당시를 생각하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묵묵히 농어촌 개척교회를 충성하여 섬기다 천국간 최 목사와 홀사모의 얼굴이 떠오른다. 얼마 전 가평 필그림 하우스에서 교단원로목사부부 초청위로회에 3년 만에 하룻저녁 참석하니 1년 동안 소천하신 7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려운 시절 한평생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다 천국에 입성한 선배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날 앞을 못 보기에 인도를 받는 목사, 휠체어를 탄 목사, 걸음걸이가 매우 시원찮은 분, 말을 잘 못하거나 귀가 잘 안 들리는 분, 기타 병자와 독거노인 등등 나도 언젠가 가야할
“개울물이 쉬지 않고 흐르면 강과 바다를 이룬다”라고 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밥만 축내고 놀기만 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얻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 비유에서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7~48)고 말씀하셨다. 또 예수님께서는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지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네가 알았느냐”(마25:26)고 책망하셨다. 19세기의 유명한 시인 롱펠로우(W. Longfellow)의 말을 들어보자. “행동하라! 세계의 넓은 내일을 위하여 행동하라! 세계의 넓은 들판에서 또는 인생의 싸움터에서 목 매인 송아지처럼 쫓기지만 말고 투쟁하는 용사가 돼라!”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32세에 비극적인 유서를 작성하고는 그의 형제인 칼과 존에게 전달할 생각이었다. 유서엔 삶에 대한 회한과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나는 지난 6년 동안 미래에 대한 막연한 희망으로 지냈다.
19세기에는 유물론과 이성적 합리주의가 서구세계를 지배하게 됐다. 유물론은 물질과 그의 운동 및 변화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 오직 볼 수 있는 물질과 실험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만이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합리주의자들은 모든 경험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구하며 인간의 이성적 사고를 모든 문제들의 주된 지침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이성을 최고의 권위에 올려놓고 말았다. 그러므로 후기 계몽주의자들은 여기서 나아가 현대과학의 관찰과 이성에 기반을 두며 결론을 유출하는 귀납적 방법을 통해 탐구를 시도했다. 여기서 과학의 업적에 의한 실제 세계는 목적에 의해 통치되는 실제 세계가 아니라 원인과 결과라는 자연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 곧 자연이야말로 존재하는 것들의 총체요, 진정한 실제라고 봤다. 따라서 과학자가 자연의 모든 비밀을 풀 수 있는 마술사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합리주의 신학자들, 곧 신신학자로 불리는 자유주의 신학자들마저 기독교 신앙에 뺄 수 없는 꼭 필요한 기적 사건을 과학과 상충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속단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 불트만(
그리스도인의 대정부관계는 선거 전에는 “좋은 대통령을 주세요”(Oh, Lord, give us a good president)였다면 선거 후에는 “좋은 대통령을 만들어 주세요”(Oh, Lord, make a good president for us)라고 하는 것이 백만 번 온당한 태도일 것이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전을 치르면서 태극기 부대와 촛불 부대는 전쟁을 방불케 했으나 종전된 지금에 와서는 평안 질서 안전 그리고 발전의 국가가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성경적인 자세일 것이다. 어쨌거나 현실세계의 태극기라는 기(旗)와 촛불을 성경에서는 어떻게 설명되고 있나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선 민수기를 펴 보았다. 민수기(民數記)는 번호(Number)이니 이는 싸움터에 나갈 장병의 수효를 센다는 책이다. 주로 민수기 2장에서 동서남북 4진영으로 나눈 군대 앞에는 군기(軍旗, Standard banners)가 펄럭이었고 그 군기 따라서 장병들이 행군하고 있었다(민2:2,3,10,18,25).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르며 자기들의 기를 따라 진 치기도 하며 행진하기도 하였더라”(민2:34)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