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께서 율법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 라고 물었던 것처럼, 설교자는 비유 안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비유를 설교하는 설교자에게 하나의 비유가 그 콘텍스트 안에서 무엇을 말하기 위해 기록됐는지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현대 청중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기를 원하는지를 진지하게 찾아 나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비유를 해석하기 위한 세 번째 관점은 비유 현장의 감동을 재현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예수님의 비유를 들었던 청중에게 어떤 감동이 있었는지, 당시 현장에는 어떤 정황이 연출됐을까를 유추해 볼 필요가 있다. 즉 당시 청중을 연상하며 감정이입을 시도하는 것이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 비유,’ ‘포도원농장 일꾼의 비유,’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등과 같이 대부분의 예수님의 비유는 반전 포인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원 청중의 감정적인 반응과 당시 그들에게 다가왔던 도전적인 교훈을 파악하는 것은 설교자에게 중요한 과제가 된다. 물론 이것이 언제나 수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때와 지금의 상황 사이에는 시간적 차이만큼이나 문화적
지난 부활주일은 더함교회가 5년째 맞는 부활 주일이었습니다. 여전히 전교인의 50%이상인 70대 이상 어르신들은 1:1로 메시지를 전해도 그 입으로 “예수님이 나의 주인 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란 소리는 쉽게 하는데 이상할 만큼 “예수님”만 말하면 딴 소리하는 현실입니다. 주입식 교육으로 따라하기 10번을 해야 앵무새처럼 영혼없이 1번 간신히 하실까 말까 합니다. 이것을 보면, 정말 예수그리스도 그 이름 만으로도 굉장한 능력이 있음을 봅니다. 그럼에도 이번 부활절 예배시간에 스승님이신 박영철 교수님께서 개척 전 전수해주셨던 알찬 복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저희는 1년에 두 번은 주일 오전예배시간에 복음을 전하는데, 이 때 기존 교인들에게도 함께 전합니다. 교회 안에 교인 중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회심한 사람은 아직 20%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이번 부활주일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늘 별로 관심없는 표정으로 들으시는 충청도 우리 어르신들에게 마지막에는 강경모드로 메시지를 전합니다. “제발 이제 오늘 내일 준비하셔야 할 어르신들, 앞집 할머니, 옆집 할아버지 돌아가셔도, 내 이야긴 아닐 것 같은 착각 버리셔요! 영원하지 않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경험했을 이야기다. 운전에 필수가 되어버린 네비게이션에 출발하기 전 도착할 장소를 입력하면 도착예정시간을 알려준다. 운전하다 잠시 휴게소에 들렸다 나오면 시간은 훌쩍 넘어가버려, 조급한 마음에 늘어난 도착 시간을 다시 줄이기 위해 속력을 내도 흘러간 시간을 줄이기란 쉽지 않다. 얼마 전 가까이에서 함께 목회하시던 분이 젊은 나이에 아직 가족에게나 주위 사람들에게 남겨진 일이 많이 있음에도 우리 곁을 떠나셨다. 진도에 내려와 만난 지 1여년의 시간에 건강하셨던 모습이 금방 무너져 버렸다.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했다. 시간을 조금만이라도 늘릴 수 있다면…. 분명 성도로서 천국을 소망하지만 아직 이 땅에 살면서 해야 할 일이 생각나 죽음 앞에서 시간을 조금만이라도 더 늘리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일평생을 주님께 헌신하며 살아도 돌아보면 부족한 것뿐이고 아쉬운 마음뿐이다. 늦게나마 깨닫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한 몸부림을 쳐도 주어진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끼며 시간을 늘리려고 애를 써본다. 그렇지만 무엇이 그리 바쁜지 시간을 늘리기가 쉽지 않다. 기도의 시간,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 맡
얼마 전 서울 명동의 유서 깊은 한 장로교회 청년부 특강을 갔다. 주제는 “기독교 세계관과 이성교제”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창조의 질서 안에서 우리에게 최고의 축복 통로로 결혼을 예비하셨다. 하나님은 처음에 아담만 먼저 창조하셨으나 독처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해서 여자를 만드시고 이끌어 오시니 아담에게 이러한 감정이 일어났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이것이 바로 연애상대를 만났을 때 도파민, 옥시토신, 노르에피네프린 같은 호르몬이 활성화되는 현상이다. 인간에게 이성교제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짝을 만나서 “합하여 둘이 한 몸”(창 2:24)을 이루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정을 세워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창 1:28)는 사명에 순종하게 하신다.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가정과 가문을 세운다. 따라서 성경은 이성교제와 결혼이 구분된 것이 아니라 이어진 한 세트의 사건이며, 선택이 아니라 사명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고 본다. 또한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세워진 가정은 그 자체가 하나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그 나라를
둘째, 독립적인 내용을 주목하는 것이다. 한 복음서의 저자가 다른 책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독특한 이야기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경우이다. 이때, 설교자는 그 저자의 의도와 목적을 그의 저술 관점과 목적에 연관하여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례로, 선교 명령을 담고 있는 마태복음(10:5~6, 15:24)은 그 범위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으로 한정하고 있는데, 이점은 마태의 주 독자들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반면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선한사마리아인 비유’(눅 10:30~37)와 치유 받은 후 유일하게 사례한 ‘사마리아 나병환자’(눅 17:11~19) 이야기는 누가의 저술 의도와 그의 신학이 마태의 경우와 다른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설교자는 복음서를 해석할 때 저자의 관점만이 아니라 예수의 관점을 동시에 고려하는 수직적 사고의 안목이 필요하다. 이는 어떤 특정 구절의 의미를 먼저(원래적 상황으로서) 예수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고 그 후 저자의 관점에서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상훈은 일례로, ‘포도원 일꾼’의 이야기를 제시한다. 수평적으로 볼 때 마태복음은 관련된 다른 기사들과 함께 마가복음을
20여년전 정상적인 양념 통닭을 먹는 것이 소원인 때가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통닭을 먹는 날은 피아노 학원 강사로 다니시던 어머니의 월급날이었는데, 쥐꼬리만한 월급에 매달 나가는 빚과 이자, 빼고 남는 돈은 몇 천원…. 그래서 유일하게 먹을 수 있던 치킨은 2,800원짜리(아직도 가격이 정확이 기억합니다.) 노점상 옛날 통닭이었습니다. 매번 어머니가 힘들게 사온 통닭이었는데, 저는 부끄럽게도 매번 친구들이 먹던 멕시칸 치킨을 찾으며 투정하며 거의 먹지 않았었습니다. 속상해 하던 어머니 얼굴이 생생합니다. 그랬던 저희 가계가 그나마 풀칠 안하고 먹고 살만 하게 된 10여년 전부터는 일 년에 10번 정도는 아무거나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있었습니다. 요즘은 어릴 때 꿈꾸는 그런 치킨을 거의 매주 먹고 있습니다. 옥천에서 함께 교제하는 목사님의 장모님 시누이가 우리교회 옆 동네 현리라는 마을에 계시는데 전도를 위해 계속 기도중입니다. 그 전도대상자 할머니가 구멍가게와 치킨집을 하고 계셔서 벌써 8마리째 치킨을 구매하고 있습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원리를 믿기에 치킨을 사며 도리어 순대 및 간식을 가지고 만나고 있습니다만, 이제 저에 대한 경계 태세는 다 무너졌습니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근원적 존재성을 다루는 로고스 찬미가 첫 단락에서 그는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로고스(말씀)로서 하나님과의 특별한 연합의 관계를 가진 신성의 존재라는 것과 그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한 권위와 능력의 존재라는 것을 제시했다. 요한은 특히 그 로고스 안에 있는 생명이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빛이 된다는 것을 통해 그의 복음서 전체를 통해 제시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유일한 실행자라는 것을 부각시켰다. 요한은 ‘생명’이란 단어를 하나님의 존재(요 5:26)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요 5:26; 11:25; 14:26)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목적을 나타내며(요 3:16; 8:12; 10:10; 17:3) 또 그의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사용했다(요 20:31).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이 있으며(요 5:26),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이며(요 10:10), 또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요 20:31). 요한은 이런 맥락에서 성육신하신
지금 더함교회는 전교인 가정방문예배 기간입니다. 3주전부터 광고시간마다 방문일정과 함께 주보에 진한 글씨로 ‘헌금 및 식사 준비 금지’라고 적어두니, 할머니들이 고민을 많이 하신 모양입니다. “예배드리러 오시믄, 밥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첫번째 집을 들어갔습니다. 파킨슨병을 8년째 앓고 있는 혼자 살고 계신 할머니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간절히 안수기도를 하고, 서비스로 안마 신공을 하고 나오려는데,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할머니 성도님이 부엌으로 가십니다. 간신히 기어서 도착한 곳은 냉장고 앞. 하나는 성미, 하나는 간식 몇 개를 미리미리 준비 해놓으셨습니다. 안 받고 오자니, 너무 서운해 하실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교회당에 도착해 열었더니, 주섬주섬 이것저것 선물 세트로 들어 있습니다. 과일 사러 버스타고 시내 시장까지(동네엔 제철 과일 파는 곳이 없음) 다녀오신 생각하니 맘이 찡합니다. 그런데, 호두과자 날짜를 보니 석 달은 족히 지났습니다. 받아오는 차 안에서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믿음으로 주신 성의 생각하여 먹었습니다. ‘주여! 제 위장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두 번째 가정을 들어갑니다. 예배를 마친 후 기도를 해 드리고, 이 새신자
벌써 큰 딸이 두 번째 유학길에 오른 지도 4개월. 미국에서의 고교 졸업 후 대학까지 진학했었지만, 학비와 향수병 등의 이유로 결국엔 돌아와 여기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도 다니던 중, 다시 또 한 번의 도전장을 내민 연유다. ‘그냥 있는 곳에서 편하게 다니다 신랑도 만났으면….’하는 아비 마음이야 왜 없겠냐마는 기도하며 결정했다 해서 또 한 번 더 뒷바라지 하게 됐다. 물론 꿈꾸던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건 기쁘다. 아는 분들은 참 좋은 학교란다. 하지만 그래도 또 2년간 얼굴 못보고 살아야 하는 부모는 여전히 허전하다. 그래서 좋기도 하지만 섭섭하기도 한, 나의 두 마음. 얼마 전 한 성도가,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도 다섯 명도 안 되는 개척교회를 섬기겠다고 기어이 떠났다. 그렇게 어려우면 교회 차원에서라도 돕겠다 했지만, 그 뜻한 바는 꺾지 못했다. 참 많은 관심과 기도를 베풀었는데, 그 또한 우리 교회를 좋아했는데, 우리 교회에도 필요한 일꾼인데, 혹 그러다 다른 상처나 입지 않을까 염려도 되지만, 이미 그렇게 결정해버렸다 하니 어찌나 섭섭하던지. 물론 언젠간 돌아오리라 믿고, 교적도 안지우고 기다리겠다며 나름 쿨하게 응했지만 그래도 섭섭한 이 마음은
고린도 전서 10 : 7~10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주시기 위해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셨을 때 밑에서 모세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디 내려오는 모세를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던 사건입니다. 그때 시내 산에서 내려온 모세를 보고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왔지만 3천여 명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치 않고 우상 숭배하는 것을 고집했습니다.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멸망시키셨던 것입니다. 왜 이들이 하나님께 멸망을 당했습니까? 이들 3000여 명은 끝까지 마귀를 기쁘게 하는 쪽으로 가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한번 받은 구원을 영원히 잃지 않는다”면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 미혹되어 빠져서 신앙생활 하다가 죽어도 천국을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찌 천국 가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이단에 빠졌다 하더라도 잘못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