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히포(Hippo)의 주교로서 펠라기우스(Pelagius)와 도나투스(Donatus)파의 이설을 반박하였고, 초기 기독교의 사상을 수렴하고 중세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 중세기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 사상과 지혜에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한다. 그는 르네상스의 여러 사상가에게도 영향을 줬으며 쿠사의 니콜라스(Nicholas of Cusa)와 에라스뮈스(Erasmus)도 역시 이에 속한다. 탁월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북아프리카 히포(Hippo)의 감독으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바로 고백록(The Confessiones)을 집필했다(A. D. 397-401년). 그가 죽고 난 이후에도 고백록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읽히는 불후의 명저다. 고백록은 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많이, 널리 읽혀진 책으로서 철학자들, 문학가들, 심리학자들, 신학자들, 평신도들, 심지어는 비기독교인들 까지도 애독하는 책이기도 하다. 특별히 하나님을 떠나서는 진정한 안식이 존재할 수 없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인 그의 신앙 표현은 오랫동안 빛나고도 남을 흔적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 신앙인의 진심어린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은 당대의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의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며 동시에 한분이심을 가르쳐 준다. 또한 삼위일체론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고백함으로써 그들의 구속과 구원의 사건을 하나님 자신의 사건으로 고백한다. 이처럼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구원의 복음의 진수를 간직하고 보호해 주는 교리이다. A.D. 325년에 열렸던 니케아 공의회는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과 동일본질(homoousios)임을 확정함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바르게 고백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의 구별을 최초로 논의한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공헌에 따라 하나님은 “한 본질(ousia, one being)이면서 세 위격들(hypostasis, three persons)”이라고, A.D. 381년 콘스탄틴노플 공의회가 결론을 내렸다. 하나님, 즉 성부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세 위격들이 서로 구별이 되면서도,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완전히 한분이시며, 동일하시다는 신앙고백을 성경적인 바른 신관으로 확정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한분이시나, 이 한분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三位)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1.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4) “죽으리라”는 말씀에 포함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지옥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 내용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의인이 죄인으로, 생명이 사망으로, 하나님이 주신 영생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그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죽으리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는 지옥으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주심(롬 3:14)”과 같이 아담과 하와 또한 인간의 죄악의 수치를 가리 우기 위해 희생 제물의 피 흘림을 통해 “짐승의 가죽옷(창 2:21)”을 입혀 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 16~17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럼 애굽에서 구원 받고, 홍해에서 침례 받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는 2길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원자 모세를 통해 믿음으로 구원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도 아담과 똑같이 2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2. [신명기30:19] “내가
따라서 성경만큼 보편적이고 영원한 책은 없다. 성경의 진리는 기록된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살아서 역사한다. 아울러 성경은 삶의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광범위한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로써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며, 영원한 진리이며, 인류 구원의 유일한 지침이며, 인간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생명의 양식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성령님의 감동하심 가운데 성경을 기록했고, 그 기록된 것을 받은 독자들이 기록된 성경을 읽을 때에 깨달음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엡 3:1-4). 성경은 읽혀져야 하고, 그 뜻이 깨달아져야 하며, 그 교훈이 개인과 교회에 의해서 실천돼야 한다. 그것은 성경만큼 뛰어난 힘과 영향력, 그리고 감화를 주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일을 하거나 또는 중요한 일에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특히 독서에 대한 것이라면 더욱 더 확실하게 목적을 되새기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냐하면 목적의식을 갖고 독서하는 목회자와 목적의식 없이 독서하는 목회자는 관심이나 흥미, 책임감이나 집중력 그리고 이해하는 관점에서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목회자는 일단 양적으
비록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가 이신칭의의 관계에서 서로 대립하고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멀린스의 ‘강권적 은혜’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론을 강조한다고 보인다. 따라서 하나님의 ‘강권적 은혜’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를 동시에 포용하고 있기 때문에 갈라디아서의 구원은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역사라는 입장에서 통전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연세대의 서중석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의 이신칭의에 관한 쟁점이 시대의 당면한 문제를 넘어 초시간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로 믿음과 행위를 이해해 왔기 때문에 대립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칭의사상은 그것을 필요로 하던 구체적인 정황 속에서 나온 이론이다. 그 정황을 무시하고 그것을 보편적이고 무시간적인 사상으로 전제한다면, 인의론은 다른 양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과 행위에 관한 양면의 칼처럼 대립적 상황을 연출한다. 기독교 신앙이 믿음을 강조하면 행위를 상대적으로 덜 강조하게 되고, 행위를 강조하면 믿음을 상대적으로 덜 강조하게 된다. 이 문제를 취급한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을 통해 그 방법을 찾는다. 그의 방법은 매우 간명하다. 루터의 대안적 방법은 갈
명성황후는 고종(高宗)의 정비(正妃)이며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어머니이다. 명성황후는 아버지 여성부원군 민치록과 어머니 한산 부부인 이씨의 소생으로서 아명(兒名)은 아영(또는 자영)이다. ‘민비(閔妃)’는 일본인들이 황후를 비하해서 만든 호칭이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고, 숙종(肅宗)의 모친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와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민아영은 열네 살 때인 1866년 신정왕후 주씨와 흥선대원군에게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어 명성황후가 됐다. 처음에 화기애애하게 시작된 대원군과 민아영의 관계는 황후가 낳은 왕자가 대원군이 지어 보낸 탕약을 복용한 후에 급사한 사건 이후에 급격이 나빠져서 정적이 됐다. 명성황후는 감히 흥선대원군의 권위에 도전해서 결국 그를 권좌에서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1882년에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과도하게 지원하다가 훈련도감에서 월급도 받지 못하고 천대 받다가 해고된 군인들이 군란(壬午軍亂)을 일으키자 장호원으로 피신하면서 권력을 상실하고 대원군이 복귀해서 민씨 일가의 세력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해서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하고 다시 권력에 복귀해서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박영효 서
일본의 작가 구리 료헤이가 1989 년에 발표한 “우동 한 그릇”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1972년 섣달 그믐날 저녁, 도쿄의 “북해정”이라는 음식점에 한 어머니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우동 한 그릇만 시켜도 되느냐고 물었다. 주인은 물론 된다고 대답하고 우동 한 그릇에 젓가락 세 개를 놓아 줬다. 그 후 그들은 섣달 그믐날 저녁마다 그 식당에 가서 우동 한 그릇을 주문했고 주인은 그때마다 몰래 소바 1인분 반을 더 올려줬다. 그런데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어느 해에는 우동 두 그릇을 주문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에 식당 주인은 어머니가 두 아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됐다. 부인의 남편이 직장에서 사고를 일으켜 죽으면서 여덟 명이 다치고 회사에도 큰 손해를 입혀서 그 가족은 십여 년 동안 일해서 그 날 빚을 다 갚고, 기념으로 우동 두 그릇을 주문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 “북해정” 식당에는 그 가족의 발길이 끊어졌다. 그러나 그 식당은 섣달 그믐날 저녁마다 손님이 아무리 많아도 그 가족이 앉았던 자리에는 “예약석” 팻말을 붙여서 비워놓고 그 가족의 사연을 알고 있는 단골손님들과 함께 그 가족을 기다렸다. 그런데 십 수 년이 지난
낮과 밤의 일기 차가 심하다. 낮에 뜨겁던 날씨가 새벽엔 찬 기운까지 돌아 이불이 생각나게 한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신다. 이곳 진도에 비가 오지 않아 늦게 벼를 심어 이제 좀 자라나고 있는데 날씨가 추워지면 물속에 잠겨 있는 뿌리가 겨울인 듯 착각하여 열매도 맺지 않고 썩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을 때에 심고 추수할 때에 추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말이다. 어느 비가 오는 날이었다. 차를 운전하여 산 비탈길을 가는데 산 아래에 차들이 많이 모여 있다. 눈 여겨 보니 누군가 산 위에서 장례를 치르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씨에 일하는 사람들이 힘들겠구나 생각을 하며 지났다. 몇 일이 지난 화창한 어느 날 비슷한 장소를 지나가는데, 마찬가지로 차들이 길가에 서 있고 산 위에서 묘지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문득 몇 일전 비가 오던 날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쓴 웃음과 함께 입에서 기도의 소리가 나왔다. “주여 좋은 날 좋은 시에 주님 앞에 가게 하소서.” 그리고 마을에서 한글학교를 하며 어르신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가 생각났다.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좋은 날 좋은 시에
신사는 원래 일본의 민간 종교인 신도(神道, Shintoism)의 사원으로서 처음에는 조선에 거류(居留)하는 일본인들을 위해 들여왔으나, 1910년 한일합방 후에는 조선인에게도 참배, 즉 태양신을 상징하는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遙拜)하는 행위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1925년에는 사립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다가 조직적 반발에 부딪혀 잠시 멈칫하더니, 1935년을 전후해서는 총독부가 앞장서서 학교뿐 아니라 교회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교계는 찬·반 의견이 엇갈려 기독교가 양분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일본은 조선을 합병할 목적으로 ‘황민화(皇民化) 운동’을 시작해서 내선일체(內鮮一體) 사상을 선양하는 한편 사회 전반에 조직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조선의 언론인, 지식인, 교육자, 종교인들이 이에 저항하자 일제는 언론사를 폐간하고, 교회와 학교는 폐교하고, 외국인은 추방하고, 내국인은 투옥했다. 일제는 1945년 6월까지 조선 땅에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면 단위에 건립된 작은 규모의 신사 1,062 곳을 세웠는데 총독부는 이것도 부족해서 각 급 학교에 ‘호안덴’(奉安殿)을 세우고, 집집마다 ‘가미다
간증은사집회가 많이 열리고 있다. 믿음 속에서 개인적으로 체험한 특별한 하나님 체험들을 다른 성도들과 공유하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유익하다. 하나님을 맛보아 체험하라고 하신 시편 34편의 찬송과 같이, 간접적으로나마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함에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때로 우려할만한 간증은사집회들과도 자주 만난다. 예컨대 천국을 보았다는 강사들이 나서서 천국을 비성경적으로 홍보한다든지, 무당 냄새가 나는 강사를 강단에 세워놓고, 문제 있는 교인들로 하여금 예언기도를 받게 하면서, 헌금 얼마를 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는 위험한 발언들을 쏟아놓는 집회들도 있다. 이러한 집회들이 일시적으로는 불신자들을 끌어 모으는 등 교회에 유익이 될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독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연예인들과 같이 대중인지도가 높은 강사들이 등장하는 간증집회는 무슨 목적으로 집회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할 때가 많다. 물론 강사들 중에는 진정으로 거듭난 믿음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신앙인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간증집회를 하는 것인지, 버라이어티쇼를 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영적 혼란을 주는 사례도 많이 있다. 이러한 부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