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롱(Thomas G. Long)의 말과 같이, 설교자는 장르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하는 모든 것들은 그에게 매우 중요하다. 만일 하나의 본문이 각 문학 장르를 통한 수사적 역량을 충분히 드러내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신실한 설교자는 본문 안에서 발견된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동일한 문학 장르 형식을 따라 설교하여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즉, 본문이 이야기라고 한다면 이야기로 전해야 할 것이고 본문이 시문학에 속한다면 그의 설교는 시적으로 전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는 너무 어렵고 힘이 들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인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에게 주어진 설교적 과제는 본문의 복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다. 즉 본문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물론 본문의 문학형식이 현대 설교자에게 설교 구성을 위한 하나의 모델이 되기에 어떤 부족함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성서시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시대와 다른 상황 속에 있는 특정한 청중에게 메시지를 들고 나아가는 설교자는 그 틀에 묶여버리는 것보다 본문을 위한 가장 좋은
현대인이 잃어버린것 중의 하나가 “감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사랑이라면 가장 따뜻한 말은 감사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란 인사를 받으면 그와 내가 하나가 되고 막혔던 담이 무너지는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감사합니다”라는 이 한 마디를 하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진심을 담아서 감사하면 모든 관계가 원만해지며 건강해지는데로 말입니다. 현대사회를 일컬어 “감사 불감증”의 시대라고 한다면 지나친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참된 감사가 사라진 것을 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 세상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 파선하고 감사가 증발하며 사랑이 식어가고 인간관계가 파괴되는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면 “상실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감사가 바닥이 나고 도무지 어떤 것에도 감사할 줄을 모르는 감사 상실증의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음을 쉽게 봅니다. 한 시대나 사회와 가정의 건강의 척도는 얼마나 감사하느냐는 “감사지수”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의 특징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하나
195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우리의 사랑을 받던 수많은 노래가 금지곡이라는 이름으로 알게 모르게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건국 이래 최초의 금지곡은 조명암이 가사를 쓰고 남인수가 노래한 기로의 황혼으로서 작사자의 월북으로 1951년 3월 1일자로 금지곡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윤복진의 찔레꽃이 같은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5·16군사혁명 후에 발족한 방송윤리위원회는 표절, 왜색, 저질 등의 이유로 1986년까지 국내외 음악 2,139곡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이들 금지곡 중에는 퇴출 되어 마땅한 노래도 있었지만 타당한 이유 없이 금지된 노래도 적지 않았다. 1970년대 초에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은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부분이 과격하다는 이유로,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와 섬마을 선생님 등 27개 곡은 대부분 왜색 노래라는 이유로, 그리고 김도향의 벽오동 심은 뜻은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금지곡이 되었다. 금년 5·18기념일을 앞두고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임을 위한 행진곡은 황석영이 백기완의 옥중 중편 시 묏비나리에서 몇 행을 발췌해서 개사(改詞)한 것에 김종률이 곡을 붙인 노래이다. 제목은 알다시피 강산, 즉 “조국을 위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지난 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성에 있어서 부활과 승귀의 국면을 살펴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과 하나님 우편에 올리어지심을 통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의 존재 곧 어떤 존재와도 비교될 수 없을뿐더러 견줄 수 없는 유일한 존재가 되셨다. 그는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가 순종하고 경의를 표하는 권위의 존재가 되셨다. 그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권능과 생명을 가지신 ‘주’님의 존재가 되셨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영원히 살아계시며 하나님의 자녀들의 구원의 완성과 완결을 위해 활동하고 계신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현재적 활동을 성령의 활동과 연결하여 제시했다. 그래서 이번 호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에 관한 사도 바울의 교훈을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서는 먼저 존재의 측면에서 그리고 역할의 측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를 살펴본다. 사도 바울의 교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는 기독교 신관의 핵심 요소인 삼위일체 신관에 기초한 국면을 보여준다. 그는 성령을 묘사할 때 ‘영’(pneu/ma)이라는 단어 단독으로 사용하기도 하며 또한 여러 경우들에서 그 성령이 나오고 있는 근원의
우리가 시편을 읽으면 찬양과 기쁨, 격려와 위로 그리고 감사와 환희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실망과 낙심, 낙담과 억압, 그리고 고통과 사별 수많은 상황들이 그 가운데 있어서 우리가 시편을 읽을 때 큰 도움을 얻게 됩니다. 시편 19편 1~6절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줍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이 하신 일을 나타내도다.” 그래서 성경은 어리석은 사람들만 하나님께서 하신 위대한 일들을 보지 못한다고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시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53:1) 그렇습니다. 오로지 어리석은 바보들의 눈에만 저 아름다운 우주의 신비로움이 어떤 폭발에 의해서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우깁니다. 하지만 1~6절의 말씀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창조되었고 존재하며 그 자연 안에서 하나님의 손길과 자기를 계시(啓示)하심을 보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7절 이하에는 대 반전의 말씀을 보이십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통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살전 5:10)” 저는 예수님 때문에 미국에서 힘들게 취득한 일반 대학 졸업장을 버렸습니다. 저는 예수님 때문에 미국 시민권뿐만 아니라 같이 살던 부모, 형제, 친구들을 다 버리고 92년도에 한국으로 역 이민 왔습니다. 저는 예수님 때문에 한국에 올 때 부모님이 사 준 아파트를 팔아 성전 구입할 당시 헌금으로 모두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저는 예수님 때문에 개척할 당시 수 년 동안 병이 들어 천안에 있는 단국대병원, 순천향병원, 천안의료원, 심지어는 한의원까지 다니면서도 효험이 없어 먹다 남은 약만 해도 농구공 부피만큼 될 정도로 건강을 잃어 죽음 바로 앞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저에게 어느 날 예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몸이 지쳐 파김치가 되어 잠을 자던 저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분은 저의 앞 시계 2시 방향으로 1m 거리에 앉아 계셨습니다. 주님의 얼굴은 희미하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몸 전체는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분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지식의 은사가 임하면서 주님이라는 깨달음이 왔을 때, 저는 얼마나 기뻤던지 말로
들어가는 말 성서를 해석하는 가장 기본적인 접근은 신학적 관점에서 주어진 본문의 원래적 의미를 찾는 것이다. 주어진 본문의 의미 파악은 성서 저자의 저술 목적과 주요 관점을 이해함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떤 글이든 그것을 이해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는 것은 그 기록된 내용의 문학적 형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문학적 형태는 장르(genre)와 구조(structure)와 문체(style)라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로 구성된다. 독자가 어떤 문학 작품의 장르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글에 대한 해석은 달라진다. 실제로, 독자들은 픽션과 논픽션을 다르게 읽으며, 과학과 신화를 다르게 읽는다. 장르를 오해하면 글의 내용과 의미를 오해하게 된다. 저술가는 특정한 표현 방식을 택하여 자신의 생각과 뜻을 드러낸다. 장르는 그의 이러한 선택 곧 글을 쓰는 방식이다. “장르”(Genre)는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말로서 영어 단어 중에 “general”(일반적인), 또는 “generalization”(일반화) 같은 단어와 연관된다. 문학에 있어 하나의 장르는 유사성이라는 조건으로 서로 연관되는 본문의 한 종류를 말한다. 문학에서 장르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정의는 서로서로 하나 혹은 그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실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드셨다.”- 프리드리히 폰 쉴러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정의 달이기 때문입니다. 왜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했겠습니까? 3월이나 12월 혹은 다른 달은 가정의 달 자격이 안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5월에 가정 또는 사람과 관련된 의미있는 기념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1일 근로자의 날을 시작으로 5일 어린이날, 8일 어버이날, 11일 입양의 날, 16일 성년의 날, 21일 부부의 날 등 참으로 뜻깊은 좋은 날들이 몰려 있습니다. 특히 15일은 스승의 날인 동시에 UN이 정한 가정의 날입니다. 가정의 달에서도 가정의 소중함을 깊이 아로 새기는 날입니다. 현대 사회는 핵가족화 되면서부터 많은 가정들이 수많은 위기와 진통을 앓으며 시련과 아픔을 겪는 요즘입니다. 많은 가정들이 무너지면서 가족해체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집(house)은 늘고 있지만 가정(home)이 줄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가정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소원은 모든 가정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부부의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오고 그 결과 “3H”(Holy, Harmony, Happy)가 깨졌습니다. 그로 인해
나무에 대해서 특별한 경험을 가졌거나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나무를 사랑하고 가꾸어 본 사람이라면 대게 자기 나름대로의 식견(識見)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필자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로서 나무에 대한 몇 가지 소견을 나누고자 한다. 목적을 가지고 심는 나무 알다시피 과일과 열매를 얻기 위해 심는 유실수, 아름다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조경수(造景樹), 목재를 생산하기 위한 조림수(造林樹), 홍수와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사방수(砂防水), 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림(防風林), 양반집 뜰에 심었다 해서 양반나무라고 불리는 남천(南天), 파란 열매가 빨갛게 익은 채 겨우내 달려 있어서 귀신을 쫓는다는 산수유, 우물가의 향나무, 울타리에 측백나무, 노충(路?)을 막아주는 상록수, 뒤안 울타리 대나무, 심은 이의 품위를 지켜주는 나무 중의 귀공자 소나무 등이 있다. 고창 선운사 둘레의 동백나무는 소나무가 화재에 약한 점을 고려해서 화재 시 불길을 막기 위해 심었다고 하며, 선비들은 글방 앞에 길상목(吉祥木) 또는 학자나무라고 불리는 회나무(懷花木) 한 그루를 심었다. 목적에 따른 관리 목재생산을 위해 조림한 나무는 아래 가지와 잔가지를 쳐서 숲에
할렐루야!(Hallelujah) 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많이 듣고 또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헨델의 메시아 할렐루야를 합창할 때 할렐루야! 부분을 부를 때는 관중들이 다 기립하여 할렐루야! 를 합창하면 할렐루야! 라는 말이 얼마나 장엄하고 감동적이고 멋있고 은혜로운 말인지 온 몸으로 느낄 수가 있다. 선교사역을 위해 외국에 가서 목회자세미나나 집회를 할 때 말이 통하지 않아서 답답할 때가 많은데 할렐루야! 라는 말은 어디서나 다 통한다. 중국에서도 베트남에서도 태국에서도 인도네시아에서도 미국에서도 그리스도인들끼리는 다 통하는 세계 공통어다. 할렐루야! 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는 뜻으로 환희, 감사, 간구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기쁠 때도 할렐루야! 하고 감사할 때도 할렐루야! 하며 기도할 때도 할렐루야를 한다. 기쁨과 감사를 표현할 때 하나님께 고백할 때 할렐루야! 라고 하는 것이다. 기쁘고 감사할 때, 좋은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기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뜻으로 할렐루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복을 주셨기 때문에, 사업을 잘되게 해주셨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