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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에 나타난 신학 산책

요한의 ‘독생자’ 기독론(8)

김광수 특임교수
침신대 신학과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의 유일성을 강조하기 위해 ‘유일하다’ 혹은 ‘독생하다’라는 형용사를 사용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되심 특히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되심을 부각시킨다. 요한은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에서 이 특별한 단어를 두 번이나 사용한다(3:16, 18). 요한은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를 통하여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면서 독생자를 통한 하나님의 활동의 두 가지 성격 곧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을 설명한다.


요한복음 3:16~21의 표현이 삼인칭 강화의 형태로 된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에 있어서 인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에 관한 요한의 신학적 입장을 나타낸다.
먼저 요한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독생하다’는 형용사는 로고스 찬미가에서 화육하신 로고스를 표현하기 위하여 이미 사용됐다(1:14, 18). ‘독생자’는 하나님과 유일한 관계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특별한 일을 완수하기 위하여 세상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독생자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활동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에 기초한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1) 먼저 부정적 의미에서 세상은 독생자를 알지 못하는 존재이며(1:10) 또 독생자와 그에게 속한 사람들을 미워하는 세력이다(15:18f.; cf. 8:23; 12:31; 16:11).
(2) 중립적 의미에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 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다(3:16f.; 12:47). 세상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활동 장소이며(8:12), 그래서 그는 세상에 왔다가 자기의 사명을 마친 후에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간다(16:28). 비록 세상이 하나님의 진리를 알지 못하고 그것을 영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세상을 사랑하신다.


요한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처럼’이라는 부사를 사용해 강조한다. ‘이처럼’은 문자적 의미에서 “이러한 방식으로”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이러한 방식”은 앞 구절들에서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처럼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만민의 죄사함을 위한 ‘희생(속죄) 제물’이 되게 하는 방식으로 표현됐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라고 말한다(롬 5:8).


사도 바울은 또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내어주셨다고 말한다(롬 8:32). 이와 같이 요한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다”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초점이 맞춰진다(cf. 갈 1:4; 2:20; 롬 8:32).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신 목적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러한 사랑의 활동은 두 가지 결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활동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생이 주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된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랑 속에서 자기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말한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7).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해 심판 개념이 처음 제시된다. ‘심판하다’는 말은 ‘구원하다’의 반대 개념으로서 ‘정죄하다’ 혹은 ‘판단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3:18),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5:24), 그리고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3:18; cf. 16:11; 12:31)라는 구절들이 다 이러한 의미를 포함한다.


반면에 ‘구원하다’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영생을 얻는 것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3:17; 5:34; 10:9; 11:12; 12:27, 47). 요한은 세상을 정죄(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나 뜻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후에 요한은 예수께서 인자가 되심을 인하여 심판의 권세를 갖고 있다고 선언한다(5:22, 27). 또 예수님 자신이 자기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다고 말씀한다(9:39).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언급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요한은 하나님의 근본 의도나 목적에 있어서는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방식을 따라 독생자를 믿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신다. 이러한 보편적 구원 사상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바울의 교훈에서도 나타난다(딤전 2:4).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의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났다. 독생자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다. 그러나 독생자를 통한 구원의 길을 거부하고 배척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하나님의 빛에 나오지 않고 어두움 속에 남아있는 것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심판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인간의 선택의 결과다. 심판은 구원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는 것은 하나님의 근본 의도를 나타내며 또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활동의 결과를 나타내는 점에서 이 두 가지 사상은 서로 보완되는 것이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멸망과 심판이 하나님의 행동의 의도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며 또 세상을 심판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행하신 구원 행동의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멸망하는 사람들과 영생을 얻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하나님의 선택의 의도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믿음의 선택에 달려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믿음으로 반응하기를 거절함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정죄(심판)에 빠뜨리는 것이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요한은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반응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에 돌린다.


요한은 독생자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의 결과를 말한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3:18). 여기서 요한은 구원과 심판의 현재성을 부각시킨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는 사람은 현재 심판을 받지 않고 있는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벌써(이미)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영생이 이 세상의 삶에서부터 시작된 것과 같이 심판도 이 세상의 삶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것을 강조한다. 독생자 앞에 ‘하나님의’라는 수식어를 삽입함으로써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되심”을 강조한다.


이것은 또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메시야 소망을 거부한다. 다윗 이래로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다(삼하 7:12~14).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교 지혜 전통에서 말하는 지혜나 다윗의 아들들의 계열에 있는 그런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그는 화육하신 인자가 되어 세상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다.


요한은 독생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미 심판을 받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3:19). 요한은 하나님의 심판에 있어서 심판 받는 사람 자신들의 성향과 책임을 부각시킨다. 그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다.


여기서 초점은 행위에 있는데, 특히 그 행위를 하는 근본 의도와 목적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의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3:20-21). 요한은 인간성의 두 가지 성향을 대비시킨다. 인간의 내면에는 선을 사모하는 성향과 악을 사모하는 성향이 있다. 이것은 중간기 유대교의 인간 이해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사상을 전달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22).


여기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율법)이다. “악을 행하는 자”는 악한 의도를 가지고 그것이 하나님의 법에 위배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그 악한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빛으로 나오지 않으며 나아가 빛 자체를 미워한다. 그들은 어두움의 자녀로서 그들의 정체가 폭로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가 악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빛으로부터 숨으려고 한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선한 의도를 갖고 하나님이 제시한 선을 행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자기의 선한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담대히 빛으로 나온다. 요한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두 가지 성향을 통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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