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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C. 펜윅(Malcolm C. Fenwick)의 북방선교-1

안희열 교수
침신대 신학과

2019년은 말콤 C. 펜윅(Malcolm C. Fenwick) 한국선교 130주년이 되는 축복과 감사의 해이다. 놀라운 것은 펜윅의 46년 선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가 ‘북방선교’라는 사실이다.


펜윅은 한반도의 북쪽 끝자락에 있는 세 곳의 ‘변방 지역’인 북한의 함경북도, 중국의 만주, 러시아의 시베리아(연해주)가 서로 만나는 곳에서 ‘변방선교’의 꽃을 피웠다. 그는 ‘함경도-만주-시베리아’라는 삼각편대의 북방선교를 동아기독교(침례교)의 선교정책으로 삼아 후원교회도 없이 단신의 몸으로 동아기독교회 가운데 약 80%의 교회를 북방선교에 투입했고, 이러한 과감한 추진의 결과는 놀라운 결실을 가져왔다. 이 때문에 그를 ‘북방선교의 대가’라 부르게 됐다.


1940년대 동아기독교의 교세를 보면 한반도에 100개(남한 40개, 북한 60개), 만주에 100개, 시베리아에 47개, 내몽고에 최소한 3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북방선교(함경도-만주-시베리아)에 가담한 교회는 무려 78%나 되었다. 무엇보다 동아기독교의 북방선교는 ‘3C’ 전략을 통해 성공했는데 ‘3C’란 헌신(commitment), 순회전도(circuit evangelism), 교회개척(church planting)의 영문 첫 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따라서 본고(本稿)는 펜윅의 북방선교의 기수였던 북한 동아기독교, 재만 동아기독교, 재러(시베리아) 동아기독교회가 ‘3C’ 선교전략과 함께 어떤 선교 정신과 정책을 가지고 교회개척을 하였는지, 그 열매가 무엇인지 평가하여 오늘날 한국침례교회로 하여금 동아기독교가 물려준 고귀한 정신적, 선교적 유산을 잘 계승토록 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특별히 연구자는 펜윅의 북방선교 흔적이 묻어있는 북한, 만주, 시베리아 세 곳을 모두 방문했는데, 이곳에서 구입한 자료와 현장방문을 기초로 해서 펜윅의 북방선교를 평가해 보고자 한다. 다만 펜윅이 내한한 이후 교단 명칭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 본고에서는 그것을 동아기독교로 통일하였을 뿐 아니라 시기는 1889년부터 1949년까지 다루게 됨을 미리 밝힌다.


I. 북방선교의 동기와 목적
펜윅이 북방선교(함경도-만주-시베리아)에 약 78%의 교회를 세운 것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북방선교에 헌신한 동기와 목적을 먼저 살펴보자. 
  
동기
펜윅이 북방선교에 집중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는 ‘선교지 분할 협정’(comity)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펜윅보다 일찍 한국 선교사를 파송한 장감 선교회는 사역의 중복과 경쟁을 피하기 위해 1889년부터 선교지 분할을 주도했는데 1892년 6월 11일에는 7개 항목으로 된 선교지 분할 협정 초안을 작성했고, 1909년 9월 16일에는 군소 교단이었던 대한기독교회(침례교), 동양선교회(성결교), 구세군 등을 제외한 상태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두 교단만이 공식적으로 선교지 분할 협정에 조인했다. 이에 따르면 캐나다 출신인 펜윅이 사역할 수 있는 곳은 함경남북도로 제한됐다.


펜윅이 1890년 가을 소래에서 서경조(徐景祚)로부터 한국어 훈련을 받다가 1891년 가을에 서둘러 원산으로 사역지를 옮겨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장감을 중심으로 선교지 분할 정책이 주도면밀(周到綿密)하게 진행되는 것을 간파했고 이에 신속히 대응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사실 펜윅은 선교지 분할 정책의 반대자였지만 원산에  정착한 후 ‘함경도-만주-시베리아’라는 북방선교의 꿈을 실행에 옮겼다.


둘째로 펜윅이 원산총부를 중심으로 함경북도의 경흥, 회령, 나진, 웅기 등지에 전도자들을 대거 투입하여 교회개척에 몰두한 것은 이 지역과 인접한 훈춘, 왕청, 간도, 만주, 시베리아와 선교 ‘교두보’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순회전도자들은 자유롭게 북한, 만주, 연해주를 오가며 복음전하는 일꾼이 될 수 있었다. 셋째로 만주와 시베리아에서의 급속한 이주 현상에 따라 이곳이 새로운 선교지로 급부상(急浮上)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펜윅은 1910년 재만 한인 인구와 재러 한인 인구가 각각 10-20만 명이었음을 밝혔다. 그가 통계를 보는 눈은 정확했는데 당시 재만 한인들이 이주한 것은 경제적, 정치적 이유가 컸다.


해방 직전 재만 한인의 숫자는 대한민국 인구의 10%에 달하는 약 216만 명 이었고, 이 때문에 만주는 매력적인 선교지였다. 러시아의 경우 1863년 조러수호통상조약 체결이후 이주가 시작되었는데, 이주 한인들은 포시에트(Посьета, 목허우)에서 ‘지신허’라는 한인 마을을,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 해삼위)에서는 ‘신한촌’을 형성하며 살았다. 연해주는 1910년 전후부터 독립운동의 거점지로서, 또한 일제에 땅을 빼앗긴 농민들이 대거 이주하였기에 펜윅은 이를 놓치지 않고 북방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목적
펜윅이 북방선교에 매진한 것은 오직 영혼구령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1906년에 대한기독교회를 설립한 이후 북방선교에 집중할 당시 한반도에는 구원받은 자가 전체 인구의 1%도 채 되지 않은 상태였고, 그가 산간벽지를 돌며 누구를 만나든지 “한국에 침례 받은[구원 받은] 교인이 15만 명 이상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는지 아십니까?”라고 물어보면 모두 다 “모릅니다”라고 답한 것을 가슴 아파하며 이방인 전도에 힘썼음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펜윅은 전통적 선교개념(선교 = 복음전파)에 목숨을 건 북방선교 전문가였다. 그는 교회개척에 있어서 ‘달인’(達人)이라 불리웠고, 스스로가 지녔던 세대주의적 전천년주의 신앙, 즉 임박한 재림신앙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꽉 차 있었기에 그의 관심은 오직 영혼 구령하여 제자 삼는 것이었다. 그래서 펜윅의 제자들은 “불고가사”(不顧家事)와 “불고처자”(不顧妻子)의 정신으로 끼니를 못 챙겨 먹거나 생명의 위협을 당해도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복음 전하는 그 자체에 만족하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