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인도 선교역사 회고

한명국 목사의 회상록

한명국 목사
예사랑교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선교사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는 1761년 영국의 국교도 출신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7세에 비국교도 기도회 모임에 출석해 말씀을 듣고 중생을 체험했다. 그간 떠돌이 구두 수선공으로 일한 청소년이었으나 1787년 8월 숫크립스교회(Sutcluffs Church)에서 26세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열정을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 있는 주님의 최후명령에서 접할 때마다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해외 이방인들의 영혼에 대한 강력한 연민으로 깊은 도전을 받았다.


캐리는 ‘쿡 선장의 항해’라는 책을 읽고 선교에 관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고 1791년 크립톤(Clinton)에서 부활절 연합 예배 때 해외 선교에 대한 설교를 했다. 영국 교회의 해외 선교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고 이듬해 노팅햄(Nottingham)에서 모인 연합 예배 때는 이사야 50장 23절을 가지고 “죽지 않는 설교”로 불리는 유명한 설교를 했다.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것을 시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것을 기대하라.”


1793년 6월 인도행 배를 타고 5개월 후 콜카타에 도착해 7년이 지나도록 한 명의 결신자도 없는 실망과 쓰라린 경험을 했으나, 오랜 침묵의 시간이 지나 성경번역으로 8년 만에 3000 명의 개심자를 보았고 35개의 언어로 성경번역 사역에 큰 성공을 거둔 뒤, 1834년 6월 9일 41년 간의 인도선교 사역을 마치면서 “나의 일은 끝났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하나님의 뜻을 따를 뿐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계선교의 역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후, 환희에 가득한 미소를 머금고 주님 곁으로 갔다. 윌리엄 캐리 한 사람이 뿌린 첫 씨앗에서 시작해 지금의 인도침례교단은 큰 성장을 이뤄 500만명의 열매를 맺었다.


아시아태평양침례교협의회(APBF)의 부회장이 되었을 때 보니 레주(Bonny Resu) 총무의 소개로 인도 동북부 나갈랜드 코히마(Kohima)에 있는 수천명이 모이는 아오(Ao)침례교회에서 한 주간 부흥회를 인도했다.
설교 내용은 첫째, 할렐루야! 하나님께 대한 찬양. 둘째, 주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셋째, 아멘! 성령의 세미한 음성에도 아멘으로 순종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곧 삼위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첫 시간 저녁 예배는 입추의 여지 없이 수천 명이 모였다. 손을 높이 들고 “할렐루야!”라고 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통역하는 분에게 혹시 나의 발음이 나빠서 알아 듣지 못한 것이냐고 물었다. 그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할렐루야!”라고 할 때 “아멘!”으로 화답하라고 하고 큰 목소리로 “할렐루야!” 라고 소리쳤더니 앞쪽에 있던 12명 정도가 작은 목소리로 “아멘!”이라고 화답했다.


나는 매시간 마다 “할렐루야!”를 복창했다. 떠나올 때는 내가 작은 목소리로 “할렐루야”라고 해도 그들의 큰 교회당이 떠나갈 정도로 “아멘”으로 응답했다. 교회는 하나님 찬양과 예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성령께 순종해 섬기는 공동체이다. 그 후 아시아 태평양 연합회의 보니 레주 총무는 나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줬다. 아오침례교회가 크게 부흥해 3년 후인 2006년에는 갑절로 큰 교회당을 새로 짓게 된 소식을 전하며 기뻐하면서 다시 초청할 것이라고 했다.


인도 나갈랜드 코히마의 아오침례교회에서 한 주간 집회를 마치고 귀국 길에 이상기 선교사의 안내로 테레사 수녀가 봉사하다 운명한 인도의 콜카타(Kolkata) 수녀원에 들러 남자 150명, 여자 150여명의 말기환자를 만났다. 길거리에 버려진 사망 직전의 불쌍한 영혼들이 장례를 치를 때까지 최후의 위로를 받고 있었는데 2층에는 테레사 수녀가 소녀 시절 예수님의 십자가상 앞에 앞드려서 눈물을 흘리며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 모양의 작은 기도실이 있었다. 교황도 이 수녀원을 다녀갔고 그녀를 성녀로 명명했다.


테레사의 원래 이름은 아그네스(Agnes)로 1910년 8월 27일에 유고슬라비아의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알바니아 출신의 어머니와 건축 일을 하며 정치 활동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일찍 죽자 어머니는 삵바느질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웠고 그러다 보니 생활이 넉넉지 않았다. 주님의 은총을 받아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소명에 따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일에 깊은 내적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이 소명에 대한 증거”라는 신부님의 충고에 이어, 18세 때 인도로 가라는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


1937년엔 종신 서원을 했고,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콜카타로 보내져 성 마리아 학교의 교장이 됐고, 로페토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로 불리었으나, 주변 불쌍한 빈민가의 고통에 관심을 두면서 1946년 기차 안에서 “수도회를 떠나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도우라”는 두 번째 소명을 받았다. 거지, 부랑자, 피난민들을 보면서 1950년에는 자비회 선교회(Charity Mission)이 탄생했다. “가난, 정결, 순종” 3가지 기본 서약과, “가난한 자들을 섬기기”를 서약하는 자매들이 늘게 됐다.


테레사 수녀의 자비의 봉사를 보고 감동한 힌두교의 피와 저주의 카리스 신을 모시는 승려들이 저들의 신전 대지를 잘라 이 외국 여인에게 희사하므로 병원 설립을 발표했을 때 기자가 “현재 가격은 지금은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었다. 테레사 수녀는 주머니에서 동전 몇 닢을 꺼내며 “여기에 두 실링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모두가 비웃었으나 수녀는 “주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나 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테레사 수녀는 1997년 9월 6일, 87세로 임종했다. 그녀가 남긴 “주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나 가능합니다.”라는 말은 91개국 의 600 여개에 달하는 “자비선교회”의 공동표어가 됐다. 이것이야말로 십자가와 부활 신앙의 승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여인에게 기적을 주신 주님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