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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해석에서 텍스트와 독자의 연관성에 대해-2

  

필자는 이사야서 599-12을 구절을 읽을 때 어떤 해석적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우선 이 구절에서 필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엄하고 무서운 징벌적 책망을 넘어서 마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인격을 무시하고 모욕적인 험한 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처럼 연상한다. 하지만 필자는나 자신에게 스스로 묻는다.

 

과연 그러한 의미로 읽고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당시 이 글을 쓴 저자는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을까? 저자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필자는 이 구절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하퍼스 바이블 코맨터리의 내용을 확인했다. 왜냐하면이 구절의 의미는 주해의 도움이 필요 했기 때문이다. 주해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선지자를 통해 보여준 그들의 고난에 대한 이유가 하나님의 부재이기 때문에 이제 이 백성들은 하나님의 부재에 대해 애곡하고 있다. 그들 자신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를 만들었다.”

 

이 중 주요한 두 단어는 하나님의 부재’(God’s absence)애곡’(the lament) 이었다. 필자는 여기서 성서의 구절과 주해의 설명에도 명백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영어로 설명한 이 주해는 명사 애곡을 슬픔, 비탄, 푸념, 애가, 후회, 애도, 애곡, 만가(挽歌)와 같은 여러 다의적인 단어들로 사용가능함으로 보여주고, 동사 애곡하다를 슬퍼하다, 비탄하다, 후회하다, 넋두리하다, 애곡하다, 또는 애도하다와 같은 상이한 단어들로 대체해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구절은 어떤 단어를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의미가 다르게 이해될 수 있고 또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가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될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 이 구절에서 저자의 의도와 현재 독자와의 거리감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사야의 저자에는 현재 이사야를 읽고 있는 독자가 없는 상태이고, 현재 독자 에는 과거의 저자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프랑스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 미셀 푸코(Michel Faucault)저자란 무엇인가?”(What is an Author?)에서 이 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저자란 사람들이 의미의 확산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표시해 주는 이데올로기적 인물이다.” 저자는 텍스트와 독자를 이해의 구성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롤랜드 바르트(Roland Barths)저자의 죽음에서 말한 것처럼, “저자란 작품의 모든 의미의 기원이고, 모든 읽기의 목표가 되는 사람이다.” 저자는 작품 뒤에 숨어 있는 초월적 기의(signifié)” 이다. 저자는 자신의 의도를 작품을 통해서 분명한 의미를 제공하는 성스러운 인물이다. 하지만 저자가 텍스트에 선행하여 존재로 있는 동안에는 텍스트는 더 이상의 의미가 생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스스로 저자의 의미를 고정하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글을 읽고 쓰는 독자에게 의미를 고정하도록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의미를 더욱 확대하여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힘이다. 이는 성서해석에서 독자가 성서라는 텍스트의 원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궁극적인 해석의 목표가 원의미를 찾는 것보다는 수많은 실존적 정황과 역사적 자리 혹은 신앙적 삶에서 풍부한 경험의 층을 이루고 있는 독자를 통해 텍스트와 만나게 된다. 이것이 성서해석이 텍스트와 독자가 이해나 의미를 나타내는 중요한 조건들로 상정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텍스트는 독자와 상호의존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의미와 이해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II. 이해의 구성요소로서의 텍스트

해석학에서 중요한 논쟁 중 하나가 텍스트에 관한 것이다. 텍스트에 관한 본성은 해석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다. 해석은 결국 텍스트와의 씨름이다. 일반적으로 텍스트는 저자의 사상과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또는 언어 외적 세계의 사태의 정황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된 일련의 언어적 조합물로 정의된다.

 

이것은 저자의 사상과 개념이 곧 저자의 의도로 받아들인다. 이 정의에 따르면, 텍스트에는 저자의 의도가 숨겨져 있고, 독자는 텍스트 속에 숨겨진 저자의 의도를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독자가 저자의 의도를 찾으려는 노력에서 텍스트는 그 의미를 스스로 한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텍스트를 저자의 한 작품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 바르트는 그의 기호학의 요소들’(Elements of Semiology)에서 텍스트를 저자의 작품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작품은 그 어떤 조건에 의해 포위되지도, 지정되지도, 보호되지도, 지시되지도 않는다. 작품에 어떤 의미를 줘야 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실천적 삶이 없다.” 작품은 한마디로 저자의 생산물이다.

 

저자는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완성했다는 의미 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은 저자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저자의 의도가 지향하는 그 의미에 제한시킨다. 그렇지만 한 저자의 작품과는 달리 텍스트를 텍스트 그 자체로 수용할 경우에는 텍스트는 스스로 이미 의미를 향한 개방성을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바르트는 이렇게 밝힌다. “작품은 하나의 기의로 닫힌다. 이런 기의에 두 가지 의미작용의 양상이 부여될수 있다. 기의를 명백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그때 작품은 문자 과학, 즉 문헌학의 대상이 된다-, 또는 이 기의가 은밀하고도 최종적인 것, 우리가 찾아 내야만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그때 작품은 해석학 또는 해석의 대상이 된다-이 그러하다.”

 

이와는 달리 리퀘르(Ricoeur)의 경우 에는 해석에서 독자가 차지하는 중요성에 비추어서 텍스트를 저자의 작품으로 읽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리퀘르는 텍스트를 글로 고정된 담론으로 정의한다. 글로 고정이 되었다는 담론은 언 어-사건 또는 언어-사용이다. 담론은 단순히 말해지거나 글로 쓰는 의사소통을 의미하고, 나아가 대화의 의미로 사용된다.

 

무엇보다도 리퀘르가 텍스트를 담론으로 정의하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로 언어체계는 가상적이며 시간 밖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담론은 언제나 시간 안에서 작용하고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실현한다. 텍스트가 담론일 경우에 저자의 의도나 의미를 초월 해있다. 비록 과거에 완성된 텍스트이 지만, 그것이 하나의 담론으로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무엇인가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둘째로 언어는 주체를 결여하고 있지만,” 담론은 인칭과 같은 복잡한 일련의 지시어를 갖는다. 담론은 자기-지시적이다. 셋째로 언어의 기호들은 오직 동일한 체계 안에서 다른 기호들만을 지시하지만,” 담론은 항상 그 무엇에 관한 것을 보여준다. 독자가 텍스트를 읽을 때 그것이 하나의 담론의 의미를 지시한다. 넷째로 언어는 단지 의사소통의 조건으로써 의사소통을 위한 부호만을 제공하지만,” 담론은 모든 메시지를 교환한다. 이것은 담론을 통해서 독자에게 무엇인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처럼 텍스트는 하나의 담론으로써 그 자체에 의해서 의미가 결정되거나 의미화되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우베르트 에코(Umberto Eco) 텍스트는 자체적으로 독자를 만드는 경향이 있는 장치이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성서해석에 이 텍스트의 의미는 매우 중요한 자리에 위치한다. 이 는 성서라는 텍스트가 일종의 권위를 지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서 텍스트는 문학이나 역사와 같은 다른 텍스트들과는 다르게 글을 읽는 독자에게 하나님의 본래적 의도를 드러낸다. 그런데 성서 텍스트가 하나 님의 본래적 의도가 시대를 초월하여 독자에게 새로운 의미로 말씀하는 것은 텍스트 스스로가 독자를 만들어내고 소통하기 때문이다. 가다머((Gadamer0가 적절히 밝히고 있듯이, “성서를 이해한다는 것은 성서의 의미에 대한 학문적 탐구 이상의 어떤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여타의 모든 텍스트와는 달리 성서의 텍스트는 중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성서의 텍스트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중의성은 한 단어가 나타내는 의미가 독자에게 다양하게 전달 된다는 뜻이다. 성서 텍스트는 시대를 초월하여 나타나기도 하고, 주어진 삶의 자리에 따라서도 다르게 전달되기도 한다. 이외에 상황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아도 상황의 맥락이나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성서 텍스트 속의 독자는 글을 읽음으로써 성서라는 텍스트를 단순히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가 말하는 내용에 경청함으로써 독자의 신앙 적, 실존적, 동시대적 삶의 정황을 고려하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의 풍부한 의미와 마주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성서 텍스트는 문학이나 역사 및 철학과 같은 텍스트들과는 상이하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성서의 텍스트가 저자의 의도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그 자체를 통해서 독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현시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된 성서의 텍스트는 닫힌 의미가 아니라 열린 텍스트로 작용한다. 시대를 초월하여 작용하고 의미화하는 성서 텍스트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이나 실존적 정황에서 나와 다른 독자와는 다르게 교훈하고 책망하고 의로 교육한다.

 

정승태 교수 / 한국침신대 신학과(종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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