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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해석에서 텍스트와 독자의 연관성에 대해-3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부분은 텍스트의 보편성과 텍스트의 개별성을 구분함으로써 기록된 텍스트의 의미를 더욱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성서 해석에서 쉽게 간과한 부분은 텍스트의 보편성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텍스트의 개별성을 등한시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나타난 문제는 텍스트가 살았고 운동력이 상실된 닫힌 의미로 여겼다는 것이다.

 

텍스트의 개별성은 성서를 읽는 독자의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삶의 정황에서 무한하고 풍부한 의미를 재생산해 내는 힘과 같다. 말하자면, 성서의 텍스트는 저자의 본래적 의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 텍스트를 통해서 말을 건네는, 즉 해석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발화하는하나님의 메시지나 뜻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왜 독자는 텍스트를 읽는가? 텍스트를 읽는 이유는 텍스트의 본래적 의미를 발견하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 이다. 문제는 독자가 규범이 아니라 텍스트가 규범이다. 독자는 텍스트에서 출발해야 한다. 종교개혁 시대에 개혁자들은 성서의 절대 권위에 굴복하고 어느 것이든 성서 텍스트 위에 군림할 수 없었다.

 

특히 마틴 루터의 경우에는 성서가 곧 스스로 의미를 드러낸다라는 해석적 원칙과 존 칼빈의 경우에는 성서가 성서를 해석한다라는 해석적 원칙을 주장했던 것을 보면 누구도 성서 텍스트 위에 군림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이해한다.

성서 텍스트는 독자를 통제하는 어떤 절대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독자는 성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교회의 전통이나 설교자에 어떤 주석이나 주해의 필요성을 느끼기보다는 성서의 텍스트가 성서를 해석하는 초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가다머(Gadamer)가 표현하고 있듯이, “성서는 텍스트의 표현 자체야말로 의미 추적의 근거가 되는 명확한 뜻,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가다머가 명확한 뜻, 즉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표현한 것은 축자적 영감의 의미가 아니라 텍스트가 스스로 그 의미를 드러낸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독자가 성서의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서의 텍스트가 열린 텍스트로써 독자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텍스트에는 이해의 가역적 요소와 비가역적 요소가 다같이 공존한다. 이해의 가역적 요소는 한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다시 원래의 이해로 되돌아오는 현상이고, 반면에 이해의 비가역적 요소는 한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현상이다.

 

이것은 테스트가 전위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텍스트는 언어 안에서 유지된다.

그것은 단지 담론의 움직임 속에서만 존재한다. 텍스트는 중단이 없다. 텍스트에는 의미의 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텍스트는 의미를 낳고 또 다른 의미로 향해 움직인다. 중단이 없는 텍스트는 그 텍스트 안에서 살아 역사하고 존재한다. 따라서 가다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해석학적 과제의 보편성이라는 것은 어떤 텍스트든 간에 텍스트에 (대한) 합당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요청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텍스트를 일단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하고, 텍스트의 의미 내용을 해석자 자신이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자체의 객관적 진리로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해라는 것은 분명히 텍스트의 의미를 구체화하는 작업이긴 하지만, 그러한 해석학적 거리를 지키면서 의미를 구체화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III. 이해의 구성요소로서의 독자

독자는 전통적으로 글이나 텍스트를 읽는 사람을 뜻한다. 글을 읽을 때 독자는 텍스트의 의미를 파악하고 그 텍스트의 생산자인 저자의 의도를 파악한다. 텍스트의 의미와 저자의 의도하려는 노력은 무엇에 대한 의미와 무엇에 대한 의도를 발견한다.

이것은 독자가 텍스트의 엄밀하고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일과 저자가 의도했던 의미를 이해하는 일에 주된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이는 독자가 하는 책무가 객관적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의 이같은 임무에 회의적 의심이 들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스테판 무어와 로버트 스콜스와 같은 성서학자들과 바르트와 데리다와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서 독자의 전통적인 책무에 대한 의심은 저자의 죽음을 선언하고 텍스트의 문자를 중요시한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문제로 삼는 것은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하는 결정자로서의 저자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그들은 저자의 죽음이 텍스트의 의미를 확산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하는 저자가 사라질 경우에 텍스트의 의미가 오히려 확대될 수 있고, 나아가 텍스트 속에 숨겨진 의미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다. 따라서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저자가 아닌 독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저자의 자리가 독자의 자리로 대체하게 되면, 해석은 전적으로 독자의 판단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되면, 독자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텍스트의 의미는 독자가 만들고 싶은 바로 그대로 만들기도 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이끌게 된다. 이것이 독자가 텍스트의 해석 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폭력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독자인 해석자가 텍스트를 희생물로 삼는 악의적 행동”(hostle act)이라고 표현한 마크 타일러가 옳다.

그러면 도대체 독자란 무엇인가?’ 텍스트와 독자의 연관성을 살피기 위해서 독자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여기서는 독자에 대한 분석은 두 가지 차원에서만 논의해 보려고 한다. 하나는 인간존재로서의 독자와 또 하나는 해석자로서의 독자인데, 본 논문에서는 이 두 차원에 한정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1. 인간존재로서의 독자

독자란 통상적으로 글을 읽는 사람이다. 누구나 책을 펴고 읽는 사람이라면 그는 독자의 범주에 든다. 그런데 읽는 사람이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존재의 범주에 속한 인간이다.

인간이라고 할 때 그는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축적된 시간적 과정에 의해 형성된 경험적 존재다. 이 시간 속에서 경험된 인간은 해석적 정황 속에서 보면 해석적 독자가 된다.

 

그가 살아온 삶, 과거의 경험, 영향을 받은 환경 및 배경은 한 해석자의 이해의 지평을 결정한다. 말하자면 텍스트의 이해는 독자의 이해관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독자는 다른 독자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의미로 텍스트를 해석하지 않는다.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차이가 결국 독자의 경험적 차원에 의존된다는 점은 부정하기가 어려울 듯 보인다. 독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중적인 측면이 고려돼야 한다.

첫 번째 측면은 독자의 역사성이다.

 

독자는 시간의 존재다. 하이데거 (Heidegger)가 말하듯이, 독자는 세계--존재. 세계--존재’(beingin-the-world)의 개념은 시간성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되는 존재 개념이다. 하이데거는 시간은 우선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지평으로써 시간성이라는 관점에서 존재를 이해하는 현존재의 존재로서 설명해야 한다라는 것을 강조한다.

 

존재로서의 독자는 시간에 기초를 두고 개념적으로 파악돼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떠나서는그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독자는 무한한 존재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일정한 역사 속에 살아 왔던 시간적 존재로 이해된다. 이는 주어진 동일한 텍스트를 읽는 두 독자가 서로 다른 의미를 말하는 것은 그들이 다른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신학자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읽을 때, 독자는 어거스틴의 시간적 자리와 배경을 초월해 읽을 수 없을 것이고, 그가 사용한 용어가 무시간적 언어가 아닌 동시대의 언어에 의해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것이다. , 독자는 어거스틴의 고백록에서 어거스틴 자신의 역사적 거리감언어에 예속됐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리퀘르(Ricoeur)가 밝히고 있듯이, “삶 그 자체가 해석이다.”

독자가 텍스트를 이해하는 행위란 결국 독자의 시간적 삶 그 자체를 해독하는 일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독자의 삶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독자는 자신의 경험적 상황 속에서 다양하게 텍스트를 읽고 의미화한다.

 

독자는 의미를 생산하기도 하지만, 의미를 해체하기도 한다. 독자는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순응자가 되기도 하지만, 텍스트를 비판하는 비순응자가 되기도 한다.

 

바르트가 말하듯이, 독자는 텍스트의 의미를 허물어버린다. 독자는 한 인간으로서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과 배경을 근거로 한다. 세계--존재자로서의 독자는 무한한 존재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다.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독자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 존재이기 때문에 텍스트를 읽을 때에 그 속에 참여하거나 개입하게 된다.

 

티슬턴(Thiselton)독자는 더 이상 메시지의 수동적 수신자로 머물지 않고, 독서 상호작용 및 반응의 과정에 적극적인 주체자로 참여한다라고 봤다.

 

정승태 교수 한국침신대 신학과(종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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