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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감사기도(삼하 7:18~29)

이희우 목사의 사무엘서 여행-33
이희우 목사
신기중앙교회

자기만 호의호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멋진 집을 지어드리고 싶었던 다윗, 그 마음을 나단 선지자에게 전한다. 나단이 기쁜 마음으로 저녁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온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5), “내 집 짓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집을 짓지 않았다고 꾸중하신 적도 없고, 집 지어달라고 부탁하신 적도 없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위해 멋진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생각한 다윗이기에 하나님은 오히려 다윗을 위해 집을 지어주겠다고 하신다(11~12).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래서 언약을 맺으신다. 핵심은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16절), ‘집’이라는 단어로 하나님과 다윗이 서로 사랑의 마음을 주고받는다. 히브리어로 ‘바이트’(בַּיִת), 헬라어로 ‘오이코스’(οἶκός), 이 단어가 7장에 15번은 나오는 것 같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했던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
다윗은 하나님 앞에 앉아 감사기도를 드린다(18),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하기, 나단을 통해 주신 다윗과 그 가문과 나라에 존귀와 평안과 견고의 복을 영원히 주시겠다는 언약이 너무 감사해서 메시지를 받자마자 감사기도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 앉은 것이다.


하나님 앞에 앉은 다윗은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본다. 아마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회막의 법궤 앞에 앉았던 것 같다.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서서 기도하거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았다. 왕이라서 그랬을까? 서서 기도하든 무릎을 꿇고 기도하든 중요한 것은 겸손한 기도인데 교만한 자세로 보이나?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얼마가 되든 상관없이 하나님과 긴 시간 함께 하겠다는 태도 같다.


어느 교회 장로가 대표기도를 하는데 담임목사가 좀 짧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그날도 습관대로 기도가 길어졌다. 창세기 아담 하와부터 시작해 가인과 아벨, 300년을 동행한 에녹, 969세를 산 므두셀라, 대홍수에서 구원받은 노아 등을 거론하며 성경 전체를 섭렵하는데 계시록의 천년왕국까지 거창하게 계속 이어갔다. 한 시간을 기도하고 눈을 떠 보니 교인들인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담임목사와 자기밖에 없다. 깜짝 놀라 “목사님, 성도들은요? 이게 웬일입니까?” 하고 물으니 담임목사님 왈, “성도들은 노아 홍수 때 다 떠내려갔습니다.” 그랬단다.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지 성경 지식을 과시하는 시간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말을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함께하는 것이 좋은 시간이다. 행복이 별거냐? 집에 들어와도 자기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던 아이가 슬그머니 거실로 나와 옆에 앉기만 해도 행복이지. 무슨 많은 말이 필요한가?


다윗의 함께하기는 사람을 의식하는 함께하기가 아니다. 영원히 축복해 주신다는 하나님 앞에 너무 좋아서, 너무 행복해서 앉은 것, 다윗의 감사기도는 하나님과 함께하기였다. 

 

겸손한 기도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18), 하나님은 겸손한 기도를 들으시고, 겸손한 자에게 복 주시는 분이다.


통일왕국의 왕, 여느 백성들과는 다른 신분이다. 대단한 인물이다. 국민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고 주변국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존재다. 골리앗의 머리를 쳐들고 선 소년 장군 다윗의 이미지는 지워지지 않는다. 블레셋 병사들이 기겁했던 역사적 인물, 한껏 기죽었던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겼다!”고 환호하며 이름을 연호했던 바로 그 다윗이다. 소년 장군 다윗만 대단했나? 아니다. 다윗 제국의 황제가 된 지금은 더 대단하다. 그런데도 다윗은 “주 여호와여”라고 한다. 하나님 앞에 왕으로 앉은 것이 아니라 종으로 앉았다는 것이다.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이 자세는 변함이 없다.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서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29). 계속 ‘주’ 여호와, ‘종’의 집이라 한다. 영원히 말씀을 듣는 종이 되겠다는 기도다. ‘복’자만 보지 말고 ‘주’ 그리고 ‘종’이라는 표현을 봐야 한다. ‘주’ 그리고 ‘종’이라는 표현이 더 많이 나오는 이유는 이게 진짜 복 받은 비결이기 때문 아닐까?


다윗의 기도는 폼 잡고 기도하는 것도 아니다. 종이 폼 나야 얼마나 날까? 다윗은 그저 “나는 누구며 내 집이 무엇인데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그런다. 그뿐인가? 왕족, 다윗 가문은 이제 이스라엘 최고의 가문이지만 다윗은 “내 집은 무엇이기에”라고 했다. 겸손한 기도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사울의 딸 미갈과 결혼할 때도 겸손했지만(삼상18:18) 왕이 된 지금도 자기 집안에 대해 변함없이 겸손하다.


다윗은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고 감탄하며 기도한다. 자신의 능력으로 대왕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잘 알았던 다윗, 분석해 보면 볼수록 그의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에서 나오는 겸손이었다.


사실 다윗 정도면 자신이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드릴 수 있는 형편이 됐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자기 능력이나 재물로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할 만도 하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 뭘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안 것, 주신 복이 감사할 뿐이다. 다윗의 감사기도는 철저하게 겸손한 기도였다. 


친근한 기도
흔히 보면 신분 높은 분들은 “목사님 기도해주십시오. 우리는 바빠서 기도하지 못하지만 목사님이 기도해주시면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습니다.” 그런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라는 미국의 유명한 작가가 ‘기도’라는 책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기자였을 때 대통령 두 명, 록밴드 U2의 멤버들, 노벨상 수상자들, 텔레비전 스타들, 올림픽 영웅 등 앞에 가기만 해도 주눅 들 만큼 쟁쟁한 인물들을 인터뷰했단다. 무엇을 물어볼지 철저하게 준비했지만, 막상 취재 때가 되면 전날 밤부터 잠을 못 이루고 신경쇠약증과 싸웠단다. ‘내로라’하는 인물들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나단에게 ‘대신 기도’를 부탁하지 않는다. 자기가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와 2인칭으로 기도한다. 


우리말 번역에는 ‘주’라고 되어 있지만 그 ‘주’라고 하는 번역은 전부 ‘You’, ‘당신’을 뜻하는 2인칭의 고백이다. 그만큼 친근한 기도였다는 뜻이다. 다윗은 연속 하나님 앞에서 “당신께서”라고 말씀한다. 우리 문화에서는 좀 건방지게 보일 수 있는 표현이다. 실제로 대표 기도자가 하나님을 “당신”이라 표현하면 듣기가 거북하다. 시를 쓸 때 3인칭 극존칭으로 쓰는 표현을 기도 때 사용하면 ‘하나님이 왜 3인칭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말 2인칭 대명사는 좀 복잡하다. 영어는 누구에게나 ‘You’ 그러면 된다. 대통령이든 할아버지든 손주든 만나는 사람 모두가 다 심플하게 ‘You’, 즉 당신이다. 우리 같으면 혼날 일 아닌가? 잘못하면 꿀밤을 맞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남편이 집에 가서 아내에게 ‘당신’이라고 부르면 “당신이라니?” 그러며 싸우나? 그 호칭에는 사랑과 애정이 담겨 있다.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도 마찬가지, 거기에는 2인칭의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 다윗은 하나님을 그렇게 불렀다.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20). 이 말은 “당신 여호와는 당신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당신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마치 사랑하는 부모 앞에 나아가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다. 


우리도 이래야 한다. “하나님, 저 하나님 좋아해요. 사랑해요. 하나님, 당신이 제 인생의 최고예요. 당신이 먼저 저를 사랑하신다는 그 말씀 너무 좋아요.”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모습을 아뢰고 있다. 그때 다윗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속에서 영혼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고 노래하기 시작한다.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22) “하나님, 당신같이 위대한 존재는 이 땅 어디에도 없습니다. 누가 당신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어떤 신들이 하나님과 똑같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최고이십니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어린아이처럼 감사의 찬양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은혜다. 그런데 이런 은혜가 하늘에서 부드럽게 내리는 보슬비처럼 우리에게도 지금 내린다. 일이 잘될 때만 내리는 게 아니다. 일이 잘 안 될 때도, 어려울 때도 내린다. 푸른 초장이든 사망의 골짜기든 원수의 목전이든 하나님은 늘 함께 하며, 보호하고 위로하고 공급하신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23:6). 기억하라. 다윗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였고, 행복한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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