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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야 들으신 기도 (삼하 21:12~14)

이희우 목사의 사무엘서 여행-43
이희우 목사
신기중앙교회

달라스침례대학교(DBU)의 김종환 박사가 ‘감사의 혜택’이라는 칼럼을 보내줬다. 김 박사는 “감사에는 심리적인 혜택도 있고, 신체적인 혜택도 있고, 사회적인 혜택도 있다”고 했다. 이 모든 혜택은 ‘영적인 혜택’으로부터 비롯되고 또 때가 있는 것 같다. 다윗이 그랬다.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14). 기도 응답, 이보다 더 큰 혜택이 있을까? 다윗의 기도 응답에 주목하며 응답받고 감사하는 삶을 살기를 기대한다.

 

3년간 기근이 이어졌다
다윗이 왕위에 오른 지 약 15년이 지나던 해(BC 995년경), 전 이스라엘의 국토에 3년간 기근이 있었다(1). 그래서 다윗이 기도하자 하나님의 응답은 사울 가문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것 때문에 일어난 재앙이라 하신다. 성경은 이 재앙을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한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사람들이 있다. 코로나나 홍수 지진 같은 것도 마찬가지라며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하는 것을 미신적이라고, 하나님을 괴물로 만드는 것이라고 펄쩍 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설교는 견강부회(牽强附會), 근거도 없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억지이고,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맞추는 것이며,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완악하거나 무지하거나 게으른 탓이라 한다.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의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하나님이 정조준해서 불법한 자들만 심판할 능력이 없었던 모양”이라고 조롱하기까지 한다. 자연재해나 사고는 복잡한 자연 현상의 결과이거나 인재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말씀은 심판이라 한다. 코로나도 마찬가지, 코로나는 한껏 높아진 콧대를 꺾고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사인이다. 묻고 싶다.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 아니라는 그 억지야말로 무슨 근거가 있나? 자연재해나 사고와 하나님은 무관하다는 주장이 오히려 하나님을 제한하는 억지이자 하나님에 대한 완악이요, 무지 아닌가?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으면 된다고 하지만 아니다. 맨날 반성만 하면 뭐하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성경을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하나님께 엎드리는 기회로 삼으라고 해야 그게 옳지 않을까?


여하튼 사울 가문은 망했다. 사울 가문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거하던 아말렉 족속 계열의 이방인인 기브온 사람들이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처럼 속이고 계약을 맺은 것 때문에 사울 가문의 사람들이 그들을 쳤던 것 같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에 사울 가문을 죽음에 내어줬고 어찌 됐든 복수는 행해졌다.


다윗이 직접 복수한 것은 아니지만 사울이 죽고 그 집안은 폭망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사울이 분명 블레셋과의 전쟁 중 죽었는데 역대상 10장에 보면 사울이 죽은 것을 하나님이 직접 하신 일로 다룬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폐위시키고 죽이셨다고 했다(대상10:13~14). 그런데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사울 집안이 다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는 오지 않았다.

 

화해가 이루어진 뒤에야 비가 왔다
다윗은 그토록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이었지만 기브온 사람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을 아낀다(7). 그때 다윗은 므비보셋 대신 아야의 딸 리브바에게서 난 사울의 아들들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아이들을 기브온 사람에게 넘겨 일곱 명이 죽었고, 리스바는 자녀들과 가문 식구들의 시신을 바위 위에 놓고 밤낮으로 애통하며 지킨다.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10), 시간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모른다. 그 소리를 듣고 다윗은 사울 집안을 끌어안아 준다. “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가져가니”(12), 그리고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14),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시신을 가족묘에 이장해 준다. 자신은 사울 집안에 조금도 악의가 없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보여준 파격적인 결단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과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거리에 못 박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면서 사울의 가문에 수치를 줬지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그 시체들을 몰래 가지고 왔었는데 이번엔 다윗이 그 시체들을 기스의 묘에 이장해 준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조상의 묘를 훼손하는 것은 큰 불화가 될 수 있다. 누군가가 조상의 묘, 특히 아버지의 묘를 파헤쳤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조선시대에 가장 큰 형벌은 ‘부관참시’(剖棺斬屍)였다. 이미 세상 떠난 죄인의 시체를 다시 파내어 형벌을 가하는 것, 이 형벌은 자손들에게 가장 수치스러운 벌이었다. 반면에 가문이나 후손에게 가장 큰 호의는 묘소를 잘 세워주는 것, 이미 세상을 떠났더라도 유해를 잘 보존해 주는 것은 두고두고 고마운 일이 될 것이다. 


가문의 악연이나 파벌의 악연은 이제 끊어야 한다. 가문의 악연은 인간사에 꽤 흔한 일이라서 섹스피어의 4대 비극까지 나왔었다. ‘햄릿’, ‘맥베스’, ‘오셀로’, ‘리어왕’ 이 4대 비극은 모두 얽히고 설킨 가문의 비극을 다룬 작품들이다. 대를 잇는 갈등과 복수는 정리해야 한다. 서로 상극인 베로나의 두 가문인 몬태규와 캐플릿 가문도 마찬가지다. 원수 집안의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되는 ‘로미오와 줄리엣’, 결론은 두 사람이 다 죽는 비극적인 종말이었다. 


 다윗은 계속되던 사울 가문과의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극적 화해를 시도한다. 잘한 일이다. 원래 화해는 흥한 쪽에서 먼저 망한 쪽을 향하여 제스처를 취해야 하는데 다윗은 먼저 손 내미는 관용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이렇게 화해를 위한 조치 이후에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다고 한다. 사울 가문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진정되면서 3년 동안의 긴 기근이 종식되고, 그 땅에 드디어 비가 내렸다는 것이다. 


화목해야 한다. 왜 구약에 화목제물이 있었겠나? 하나님께서 반목을 싫어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목하며 죄를 짓던 인간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제물을 바쳐 화목제물을 삼게 하셨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생명을 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다시 화목하게 하셨다. 둘이 하나 되게 하신 것, 그렇다면 우리도 화목하게 하는 피스 메이커(peace-maker)가 돼야 한다.

 

블레셋 거인족들을 물리치다
다윗 평생의 원수는 블레셋이었다. 첫 등장도 블레셋 골리앗과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블레셋은 다윗이 망명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통일왕국의 왕으로서 처음 치적도 블레셋을 공격해서 무력화시킨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 싸움에서 블레셋인들은 괴물같이 묘사된다. 거인족이라는 표현이 계속 나온다(16, 18, 20). 심지어 19절에서는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까지 등장한다. 히브리어 원문은 ‘골리앗의 아우’가 아니라 ‘골리앗’이라 했다. ‘라흐미’란 이름도 없다. 다윗이 이미 죽였던 이름 골리앗이 또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엘하난이 죽였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역대상 20장 5절에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라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 개역판에 그 ‘라흐미’를 끌어다 여기에 덧붙인 것이다. 한국 개역판에만 라흐미가 나온다. 성경은 골리앗에 더하여 20절에는 손가락 발가락이 각각 여섯 개씩 도합 24개인 괴물로까지 언급한다.


아카데미상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에도 지하에서 기생하는 인간이 상류층에게는 괴물처럼 그려진다. 우리의 바운더리(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해 주는 자아의 경계) 밖의 존재들을 괴물처럼 만들어 배제시키고 물리쳐야 할 적으로 만든 것을 지적한 것이다. 때로는 권력이나 언론이 그런 가공의 괴물을 만들어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도 평범한 사람들이다.


성경을 이스라엘 중심으로 읽기 때문에 이방인들은 바이러스 보균자나 괴물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눈에 블레셋이 괴물처럼 보인다면 블레셋인의 눈에는 이스라엘이 괴물처럼 보일 수 있지 않을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그런 경계와 배제로 이웃을 보며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화해하고 공존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다 형제이기 때문이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경계도, 지혜로운 자나 야만인의 경계도, 주인이나 노예나, 남성이나 여성이나 어떤 상대방도 적이 아니다. 


하나님은 거인족에 대항한 이스라엘에게 통쾌한 승리를 주셨다. 하지만 승리에만 도취하면 안 된다. 오히려 분별과 배제와 혐오의 눈으로 바라보던 시각에 대한 반성도 생각해야 한다. 아브라함 링컨은 남북전쟁 후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이렇게 외쳤다. “어느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두를 향해 사랑의 마음을 품자” 승자답게 손을 내민 것이다. 승자가 내민 것(밀어낸 것)이 아니라 손을 내밀므로 완전한 승자가 된 것이다. 기억하자. 인간과 인간이 서로 화해할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은 귀를 열고 기도를 들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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