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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펜윅과 대한기독교회의 복음주의 신앙과 항일활동과의 관계

말콤 펜윅 다시보기-1
김용국 교수
한국침신대 신학과(교회사)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전신인 대한기독교회는 일제강점기 교단 창설자 말콤 펜윅 선교사의 비정치적 신학의 영향으로 초교파적 항일운동에 소극적이었다. 교단은 민족주의에 기초한 독립운동이나 항일활동을 전개하지 않았으나, 친일을 결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반대로 성경적 진리와 복음주의 신앙을 지키는 과정에서 일제의 통치에 저항했고, 결과적으로 항일활동을 실행했다. 대한기독교회는 애국주의를 표방했으며, 일제의 통치가 신앙의 자유와 정교분리를 침해하는 경우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항거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로는, 1)을사늑약 체결 직후인 1905년 11월 19일 장로교, 감리교와 함께 교단 연합구국기도회를 개최했고, 2)1906년 펜윅 작사의 애국가를 교인들에게 보급했으며, 3)1916년 「포교계」 제출을 거부해 수난을 당했고, 4)1930년대 신사참배를 지속적으로 반대해 박해를 받았으며, 5)1940년대 교단 폐쇄를 불사하면서도 예수 재림과 천년왕국 신앙을 고수했다.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전신인 대한기독교회는 일제 강점기 민족의 아픔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대표적인 한국침례교 역사가 허긴 박사는 대한기독교회는 선교사 말콤 펜윅의 영향으로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라는 민족적 비극을 외면하고, 재림 신앙에 파묻혀 복음전도에만 몰두하며 3·1독립만세운동에도 동참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역사는 “두고두고 길이 새기면서 자성하고 반성해야 될 우리의 믿음의 자세”라고 일갈했다. 그런데 허긴의 주장과 달리, 다수의 한국침례교 목회자와 교인들은 대한기독교회가 박해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했기 때문에, 분명하게 항일활동을 실행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불일치는 항일활동에 대한 견해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허긴은 교단이 신사참배 반대를 넘어 보다 조직적으로 항일활동을 펼쳤어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복음전도에만 매몰되어 민족의 현실을 외면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펜윅의 영향으로 대한기독교회는 비정치적 신앙을 가졌고, 그로 인해 초교파적 민족운동에 소극적이었다. 선교 대상자들은 성경보다 먼저 선교사로부터 신앙을 전수 받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선교사의 영향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대한기독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대한기독교회는 펜윅에 의해 설립됐으며, 그가 유일한 선교사였기에 그의 신앙과 행습이 대한기독교회의 신조와 규칙이 될 정도로 교단에 절대적 영향을 끼쳤다. 일본의 통치에 대한 교단의 반응도 펜윅의 신앙과 생각이 주요 판단 기준으로 작용했다. 펜윅은 1935년 12월 6일에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전수한 신앙과 행습은 1944년 5월 10일 일제에 의해 교단이 폐쇄되기까지 고수됐다.


펜윅과 대한기독교회는 민족주의에 기초해 독립운동이나 항일활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교단은 일제에 부역하거나 친일의 결정을 한 적이 없었으며, 거의 일관되게 항일적 태도를 견지했다. 교인 중 일부는 이러한 행동을 민족운동에 동참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8‧15 해방 후 교단 재건을 위해, 1946년 2월 9일 충남 부여군 임천면 칠산교회에서 개최된 임시위원회 회의에서, 이덕여 감로는 교단이 “민족운동에서도 완전히 떠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는 의견을 제시한 적이 있다. 이덕여는 교단이 일제의 명령을 거부한 것을 민족운동으로 여겼던 것이다. 대한기독교회는 항일투쟁이나 독립운동을 펼치지 않았으나, 일제의 통치에 항거하는 행동을 했다. 교단은 어떤 때는 항일적인 행동을 했으나, 다른 때는 민족운동에 동참하지 않는 다소 모순된 입장을 취했다. 그것은 대한기독교회가 민족주의에 기초한 항일운동이 아니라, 복음주의 신앙을 기준으로 일제에 항거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요구가 그들의 신앙 양심에 맞지 않을 경우 저항했던 것이다. 이 글은 일제의 본격적인 한국 국권 침탈이 시작된 1905년 을사늑약부터 1944년 일제에 의한 대한기독교회의 폐쇄 때까지, 펜윅과 대한기독교회의 복음주의 신앙에 기초한 항일활동을 살펴볼 것이다.


대한기독교회의 설립과 교단 명칭 변경
대한기독교회의 역사는 26세의 캐나다 출신 초교파 평신도 선교사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이 1889년 12월 11일 부산항에 입항하면서 시작했다. 펜윅은 서울과 황해도 소래에서 각각 10개월을 머문 후, 1891년 가을 함경도 원산에 정착했다. 그는 1893년 봄에 도미해 보스턴의 클라렌돈가 침례교회의 아도니람 고든(Adoniram J. Gordon) 목사가 설립한 보스턴선교사훈련학교에서 약 1년 정도 공부한 후, 1894년 4월 학급 동료인 에드워드 폴링(Edward Clayton Pauling)을 비롯한 몇 명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펜윅은 학업을 하는 동안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개진했고, 고든은 새뮤얼 씽 안수집사가 외동딸 엘라를 기념해 세운 엘라씽기념선교회를 통해 한국 선교를 하도록 했다. 최초의 엘라씽선교사로 폴링과 그의 약혼녀 마벨 발렌타인 홀, 여선교사 어맨더 개더라인(Amanda Gardeline) 등은 1895년 봄에 서울시 종로구 내자동 201번지에 1000여 평 규모의 선교 본부를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선교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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